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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대기자의 人]환자들이 붙잡아… 33년 됐는데도 병원 못떠나는 남자

입력 | 2016-08-20 03:00:00

제4회 성천상 수상자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명예원장




물리치료실을 찾아 환자들의 회복상태 등을 물어보고 있는 김인권 명예원장. 그는 애양병원에서만 4만 건이 넘는 수술을 했다. 수술을 빨리, 깔끔하게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그 요령을 묻자 “아무리 바보라도 오래하면 노하우가 생기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여수=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심규선 대기자

흔히들 물러날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리에 연연하면 그동안 쌓은 공마저 빛이 바랠 수도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만약, 떠날 때가 됐는데도 더 있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명예원장의 자료를 읽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간 ‘기분 좋은 의문’이다. 그는 1983년 5월 애양병원에 정형외과 과장으로 부임해 1992년 부원장이 됐고, 1995년부터 원장으로 근무하다 올 3월 65세 정년으로 병원을 떠나야 했다. 근무기간 33년. 그런데 지역주민들과 전국의 환자들이 김 원장이 병원에 더 남아줄 것을 희망하자 병원 이사회는 그를 명예원장으로 추대했다.

이달 9일 오후 전남 여수시 율촌면 구암길에 있는 애양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오전에만 13명을 수술했다고 한다. 이름만 ‘명예’지, 하는 일은 완전 ‘현역’이다. 먼저 “정말로 편해지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안주하는 게 제일 싫다. 병원은 이제 200병상을 갖추고 매년 11만 명이 내원할 만큼 성장했다. 이제는 외국에 가고 싶다. 의료환경이 어려운 나라에서 롱텀으로(오랫동안) 살고 싶다.”

그는 그동안 케냐,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미얀마,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진료, 수술, 교육 등 꾸준히 의료봉사활동을 해왔다. 본업이 있다보니 오래 체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해외의료봉사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 뜻은 알겠는데 그의 입에서 ‘안주(安住)’라는 말이 나온 게 신기하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온 사람도 드물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데 말이다.

그를 말하면서 한센병과 한센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센병 전문병원인 국립소록도병원과의 인연이 그를 오늘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1975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77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한다. 그때는 전문의 시험자격을 얻으려면 6개월간 무의촌이나 의료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근무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는 소록도병원을 택했다. 소록도병원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료취약지역 근무를 군복무로 인정하는 공중보건의제도가 새로 생기자, 그는 “가본 데를 가는 게 좋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소록도병원을 찾았다(나중에 그는 그 결정을 ‘정’이나 ‘그리움’으로 표현했다).

1980년부터 3년간의 공중보건의 근무가 끝나자 그는 애양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부임한다.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곳보다는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곳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한센병 환자와 소아마비 장애인들을 치료하겠다.” 꼭 초등학생 결심 같다. 중요한 건 그가 초심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애양병원은 원래 한센인 치료를 위해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병원이다. 김 명예원장은 소록도병원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할 때 애양병원의 스탠리 토플 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애양원 100년사인 ‘구름기둥, 불기둥’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시 토플 선교사도 김인권 원장을 눈여겨본 듯하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병원 직원들에게 ‘김인권 박사가 군복무를 마치면 반드시 애양원에서 일하도록 기도하십시오’라며 거듭 당부했다. 유경운 병원장도 역시 병원 내 예배실 칠판에 항상 ‘김인권 박사가 애양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라는 글을 써두고 직원들의 기도를 독려했다.”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애양병원장을 지낸 유경운 원장은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을 기리는 인촌상 공공봉사부문상을 1992년에 수상했다.)

하느님에게까지 부탁해서 사람을 원한다? 이보다 더 간절한 희구(希求)가 어디 있겠는가. 청년의사 김인권은 기도에 응답했다. 애양병원은 한센병 전문 병원이었으나 한센병 발병이 줄어들면서 소아마비 수술로 큰 명성을 얻었다. 수술을 받으려면 한때 1년 반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정형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즈음에는 소아마비 환자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병원을 뇌성마비, 노인병, 인공관절 중 어느 곳으로 특화시킬지를 고민했다. 결국은 인공관절 쪽으로 결정했다.”

애양병원은 지방의 작은 병원인데도 시대 변화에 맞춰 한센병에서 소아마비로, 소아마비에서 인공관절로 선택과 집중을 잘 해왔다. 인공관절 시대를 이끈 것이 바로 김 명예원장이다. 그는 하루 평균 300여 명의 환자를 보고, 많을 땐 하루 20건의 수술을 집도했다. 그가 애양병원에서 한 수술은 줄잡아 4만 건에 이른다. 국내 정형외과 전문의 가운데 고관절 수술의 일인자이기도 하다.

수술하는 그의 손은 빠르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어떻게 동시에 두 가지가 가능하냐고 묻자 그는 “수술을 많이 하다보면 아무리 바보라도 노하우가 생기지 않겠느냐. 그리고 조수, 간호사 등 우리 병원의 수술준비팀이 매우 탁월하다”고 했다. 병원은 1990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고, 최근 20년간이 병원 역사 중 가장 역동적인 시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둘 것이 있다. 애양병원에 손님이 몰리고, 흑자를 냈다고 해서 병원이 영리추구에 몰두했다는 뜻이 아니다. 김 명예원장은 ‘의술 위에 인술(仁術)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오는 환자는 무조건 받고, 불필요한 검사는 생략해 비용은 최대한 줄이며, 특진 없이 오로지 대기 순서로 진료하고, 수술은 나이가 많은 환자부터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애양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돈도 빽도 없는’ 환자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환자들이 몰릴 수밖에.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달라고 하자, 김 명예원장은 가정이 잘 유지된 것과 애양병원이 기독교정신을 지켜가며 성장해온 것을 꼽았다. 기독교 정신은 설립 목적인 희생과 봉사를 뜻한다. 병원을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키워왔다는 조용한 자부심이다.

가족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그는 29세 때 먼 친척의 소개로 만난 이숙희 씨(62)와 결혼했다(여러 자료에 ‘아내’라고만 나오기에 왜 아내 이름은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물어보지 않으니까 대답을 안 했지’라고 해서 이번엔 이름을 밝힌다). 그는 아내에 대해 “요새 사람 같지가 않다. 매우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 병원 관계자들이 “원장 사모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 걸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또 하나. 그는 애들을 절대로 외국 유학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유가 재미있다. “돈에 쪼들리면 집사람이 월급 많이 주는 다른 병원으로 가자고 할지도 모르잖느냐. 그리고 외국 가서 잘된다는 보장도 없고, 잘된다 한들 부모한테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 딸(36)은 법조계에서, 아들(33)은 의사로 일하고 있으니 그의 고집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점을 느꼈다. 하나는 유머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성격이 낙천적,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둘 다 주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장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근무했는데도 그에게 별명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모나지 않은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물리치료실로 가는 도중에 그는 닷새 전에 고관절 수술을 한 50대 후반의 여자 환자와 조우했다. 여자 환자가 말했다. “선생님, 수술을 아주 잘 받은 것 같아요. 행복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의사가 더 행복할 것 같다.

여러 곳에서 김 명예원장의 선택을 치하했다. 세계성령봉사상, 장기려 의도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여수시민의 상 등이 대표적이다. 믿음이, 동료의사들이, 국가가, 모교가, 지역사회가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그는 이번에 또 하나의 상을 받는다. JW그룹의 중외학술복지재단이 제정한 성천상의 제4회 수상자로 결정됐다. 성천상은 JW중외제약의 창업자인 고 성천(星泉) 이기석 사장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의료복지를 증진하고 사회를 따뜻하게 만든 참의료인을 찾아내 격려하는 상이다. 시상식은 23일 오후 6시 서울 조선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107년간 지키려 한 건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
 
여수애양병원의 어제와 오늘
 
1909년 미국인 의료선교사, 걸인 나병환자 가마서 첫 치료
창설 100년 만에 병원 리모델링… 서양식 건물에 한국식 토담 인상적







1967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지은 최신식 애양병원. 동상은 1960,70년대 이 병원 원장을 지내며 병원 발전에 헌신한 스탠리 토플 부부.

여수애양병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숙연해지는 대목이 많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종교적 믿음과 헌신, 봉사의 정신으로 낯설고 물선 이역만리 조선에서 의료 선교에 매진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겁 없는 열정 때문이다. 세상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애양병원의 역사는 190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목포에서 사역하던 의료선교사 윌리 포사이스는 광주에서 근무하는 동료 의사 클레멘트 오웬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러 광주로 향하던 중 나주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쓰러져 있던 여자 걸인을 만났다. 나환자였다. 그는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광주선교부에 도착한다. 4월 5일의 일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실천한 그의 태도는 주변에 감동과 충격을 안겨줬다. 그러나 광주진료소의 다른 환자들은 반발했다. 나병은 당시 치료가 불가능하고 전염까지 되는 ‘천형(天刑)’으로 알려졌기 때문. 할 수 없이 그 여인을 근처의 벽돌 굽던 가마로 옮겨서 치료를 시작한다. 이날이 애양병원의 시작이다.

광주선교를 맡고 있던 의사 로버트 윌슨은 자신의 교단인 미국 남장로교와 해외 성금 등을 모아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을 개원한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와 병원 밖에서 숙식을 하며 입원을 기다리는 환자들도 많았다.

“한 소녀가 문밖에 서 있네/눈에는 눈물이 가득한 채/버림받은 작은 문둥이 소녀/이처럼 어린 나이에/나는 문지기를 찾아/아주 하찮은 돈을 꺼내/아이에게는 천국을 사주고/나는 더 큰 천국을 얻었다네/아이는 문 안으로 들어오며/나를 쳐다보며 미소 짓네/그러면서 나에게 천국의 의미를 알려 주네/이 작은 문둥이 소녀가.” 애절한 이 시는 1924년 광주나병원을 방문했던 아서 한센이라는 미국인이 매년 돈을 내는 조건으로 한 소녀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에 쓴 것이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면서 민원이 늘어나자 조선총독부는 병원의 이전을 강요한다. 그래서 1926년에 쫓기듯 지금의 여수로 이전한다. 처음에는 나환자수용소라는 이름을 쓰다가 1935년 애양원(愛養園)으로 바꾸었다.

병원은 1967년, 미국 남장로교의 지원으로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2층짜리 병원 건물을 짓는다. 이 무렵 한창 소아마비 환자들이 몰려들 때인데, 새 병원 건물에서는 나환자와 소아마비 환자들을 같은 층에서 치료했다. 한국 최초의 시도였다. 그동안 원장은 로버트 윌슨(우월순), 엘머 보이어(보이열), 스탠리 토플(도성래) 등이 맡았다. 병원 앞뜰에는 이들과 포사이스 선교사의 공덕을 기리는 4개의 비석이 서 있다.

기독병원이라는 이유에서 애양병원은 한때 규모를 키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러나 김인권 원장은 사회변화와 고객의 요구에 맞춰 병원 창설 100년 만인 2009년, 1967년에 지은 건물을 100억 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리모델링했다. 1926년 여수로 옮겨올 때 처음 지은 2층짜리 석조 건물(등록문화재 33호)은 2000년 애양원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고, 그 건물 뒤에는 2014년 정부 예산으로 번듯한 자료관도 지었다. 한상인 병원 행정국장은 “역사관과 자료관에 전시한 자료들은 매우 풍부하며 정리도 잘돼 있어 우리나라 한센병과 치료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애양병원은 새로운 100년을 맞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 병원을 만든 이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이고, 바꿔야 할 것은 의료기구와 기술, 설비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병원 건물은 서양식인데,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한국식 토담이었다. 애양병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절묘한 융합을 상징하는 듯하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