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2012년 2월 14일 미 국방부에서 미 육해공군 및 해병대를 사열하고 있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펜타곤을 방문한 것은 시 주석이 처음이다. 사진 출처 미 국방부 홈페이지
최영해 국제부장
냉전시대였다면 적군의 수장(首將)이었을 터인데, 사열대를 뚜벅뚜벅 걷는 시 주석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절감했습니다.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과 애슈턴 카터 국방부 부장관이 당신을 반기는 장면에선 역사책 한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사람으로 ‘과거의 적을 친구로 손잡는 세상’을 목격하면서 야릇한 흥분과 더불어 복잡한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그날 시 주석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호방한 기개는 거대한 체구 못지않게 잊지 못할 것입니다. 6·25전쟁 때 극악무도한 중공군의 모습과 시 주석의 얼굴이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오늘 지면을 통해 공개편지를 쓰게 된 것은 조만간 한반도에 배치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때문입니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나 시 주석이 즐겨 읽는다는 환추시보는 날만 새면 한국을 겁박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 이름까지 들먹이는 이들의 선전선동은 저잣거리의 시정잡배와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마치 6·25전쟁 때 밤에 꽹과리와 징을 들고 나와 연합군의 혼쭐을 빼놓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보는 듯합니다.
중국에 사드가 목구멍의 생선가시라면 한국에 북한 핵은 언제 휘두름을 당할지 모를 목전(目前)의 칼날입니다. 시 주석이 위험천만한 칼날엔 눈을 꾹 감고 자기 목구멍의 거추장스러운 가시만 탓하는 것은 적반하장입니다. 북핵과 미사일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으로선 그야말로 절체절명이자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3월 26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뉴욕타임스(NYT) 외교 전문기자 데이비드 생어와 인터뷰하면서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지 않는 북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중국의 친한 최고 지도층 인사한테 북한과의 관계를 물으니 ‘중국은 북한에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 북한을 지탱하는 혈액은 중국에서 나온다. 중국은 틈만 나면 우리 면전에서 ‘북한을 제재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 더 노력할게, 정말이야, 진짜 노력하고 있다니까’라고 말한다. 그러고선 옆방에 가 북한과 낄낄거리며 웃는다. 완전히 우리를 갖고 논다.”
트럼프의 이 정곡을 찌른 말에 시 주석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뜨끔하지 않습니까.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시 구절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을 시 주석이 읊은 것을 기억하시지요.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 한중 간 우호가 오래 지속되고 더욱 긴밀해지기를 바라는 속내를 보여줬습니다. 그러기에 박 대통령은 미국을 등한시하고 중국에 경도됐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톈안먼 광장 성루에 올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 것이 아닐까요. 한국과 중국이 함께 발전하려면 서로 도와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드 문제 하나로 두 나라가 이렇게 들썩여서야 되겠습니까. 반만년 역사상 지금이 최상이라는 한중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 주석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려 봅니다.
최영해 국제부장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