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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조동주]달콤한 혁명, 쓰디쓴 뒷맛

입력 | 2016-08-22 03:00:00


조동주 카이로 특파원

“또 혁명하면 되지 뭐.”

저녁을 함께 먹던 이집트 남성 아흐메드(가명·34) 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집트 정부가 세금과 물가를 올리고 있는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까지 벌어지면 살기가 더 팍팍해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경기침체로 극심한 달러난에 몰린 이집트는 최근 IMF로부터 3년간 120억 달러(약 13조2500억 원) 구제금융을 받기로 잠정 합의했다.

이집트는 최근 전기요금 담뱃값 유류비 등 생활밀착형 비용을 잇달아 올렸다. 전기요금은 40% 인상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40%를 올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갑에 19이집트파운드(약 2470원)였던 말버러 담배는 30이집트파운드까지 치솟았다. 보조금 덕에 1이집트파운드에 불과한 지하철 요금도 곧 오른다. 12∼14%의 부가가치세도 9월부터 도입된다. 이런 상황에서 IMF 사태까지 맞게 된 이집트 국민은 불안과 불만에 휩싸여 있다.

IMF 사태 당시 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이며 국민들이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했지만 지금 이집트에서 그런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5년 동안 두 번이나 혁명으로 정권을 퇴진시킨 역사적 경험은 보다 손쉬운 해결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경제를 살리지 못해 국민의 염원을 이뤄주지 못한 정권엔 혁명의 쓴맛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 주도의 장기 해결책보단 단기간 분노를 집중시켜 정권을 바꿔버리는 걸 더 쉽게 여기는 게 이집트의 현실이다.

2011년 1월 이웃국가 튀니지에서 흘러온 ‘아랍의 봄’ 열기를 타고 수도 카이로에 군집한 수백만 명이 30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몰아낼 때만 해도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민주주의만 갖춰지면 장밋빛 미래가 도래할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국제사회는 혁명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정작 경제 문제에선 냉정했다. 그동안 나라를 먹여 살렸던 관광과 수에즈 운하 통관 사업은 국제사회의 불안한 시선 속에 수직 낙하했다. 2012년 들어선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은 하루에 정전이 8번 되고 주유소에 기름이 메마르게 만들 만큼 통치 능력에 결함을 드러냈다.

혁명의 단맛을 봤던 이집트 국민은 다음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는 대신 새 정부 집권 1년 만에 다시 혁명을 택했다. 아랍의 봄이 무색하게 다시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이끄는 군부정권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사이 나랏빚은 2011년 8000억이집트파운드(약 100조 원)에서 2016년 2조3000억 이집트파운드로 급증했다.

산업 기반이 취약한 이집트는 미국과 유럽 국가의 원조에 의존하다가 세계은행(30억 달러) 아프리카개발은행(15억 달러)에 이어 IMF에까지 손을 내밀었다. IMF는 이집트의 외환보유액(150억 달러)에 준하는 거금을 지원하며 1997년 한국처럼 잔혹한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이집트 군부정권이 국민 지지의 버팀목으로 삼아온 전기 유류 수도 철도 등 각종 정부 보조금을 대거 삭감하고 여러 세금을 신설하라는 조건이 뒤따랐다.

아무리 외국 원조를 당연시해 원금을 제대로 갚는 데 익숙지 않은 이집트라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IMF의 구제금융만큼은 입을 싹 닦기 어려울 거란 관측이 많다. 지금도 젊은층에게선 ‘혁명하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가고 싶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는 판국에 IMF 사태가 본격화하면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달콤했던 혁명의 열매는 어느새 쓰디쓴 맛만 남겼다.
 
조동주 카이로 특파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