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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강국 일본 어린이들, 한국 과학학습 만화에 빠지다

입력 | 2016-08-24 03:00:00

‘살아남기’ 시리즈 한현동 작가… 日도쿄 서점 사인회 현장 열기




일본 도쿄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20일 열린 사인회에서 한 아이가 한현동 그림작가(왼쪽)와 악수하며 수줍게 웃고 있다. 줄을 선 아이들은 ‘살아남기’ 시리즈에 대해 “100번 읽어도 싫증이 안 난다” “서점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래엔 아이세움 제공

‘물 부족에서 살아남기’ 한국판(왼쪽)과 일본판.

“센세이, 아리가토 고자이마스(선생님, 감사합니다).”

일본 도쿄 라라포트 쇼핑몰에 자리한 기노쿠니야 서점에는 20일 한껏 신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본에서 530만 권 넘게 판매되며 큰 인기를 모은 과학 만화책 ‘살아남기’ 시리즈의 한현동 그림작가(39)가 사인회에서 주인공인 지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씩 책에 그려 주고 있었다. 한 여자아이는 양손을 활짝 벌린 채 달려와 한 작가의 두 손을 와락 잡기도 했다.

이달 초 일본에서 출간된 ‘물 부족에서 살아남기’는 출판 도매상인 도한이 집계하는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지난주 종합 5위까지 올랐다. 한국 출판물이 일본에서 이처럼 사랑받는 경우는 드물다.

미래엔 출판사의 아이세움에서 2001년 출간해 지금까지 51권이 나온 이 시리즈는 미국, 대만, 태국 등 7개국에 수출됐다. 한국(1100만 권)을 포함해 국내외에서 2800여만 권이 판매됐는데, 일본은 중국(800만 권)에 이어 해외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나라다.

○ 모험하다 보면 과학 지식이 쏙쏙

“선생님은 지오를 그릴 때 눈을 가장 먼저 그려요. 이렇게요∼.”

사인회에 앞서 열린 그림 교실에서 한 작가가 화이트보드에 지오의 눈을 그리자 “와!”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림 교실 바로 옆에는 ‘살아남기’ 시리즈만 모아 놓은 책장이 2개 있었다. 일본 출판을 담당한 아사히신문출판의 나카무라 마사시 서적본부장은 “일본의 대형 서점 대부분에는 ‘살아남기’ 시리즈 서가가 별도로 있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는 사건과 위기가 이어지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과학 지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아이들을 사로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웃집 친구 같은 친근한 캐릭터와 역동적인 그림, 익살스러운 표정과 행동도 한몫한다. 히라노 가즈키 군(10)은 “모험이 재미있고, 실수를 하지만 멋진 면도 많은 지오가 좋아 새 책이 나오면 바로 사서 본다. 20권 넘게 보다 보니 흥미가 없던 과학도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20권 가까이 읽었다는 미야케 미라이 양(9)은 “‘인체에서 살아남기’가 제일 재미있다. 지오는 평상시는 잠꾸러기인데 위험이 닥치면 실력을 발휘해서 좋다”며 웃었다.

○ 일본 학습 만화 시장 개척

이날 취재를 나온 출판문화 전문 신문인 분카쓰신(文化通信) 호시노 와타루 편집장은 “2008년 일본에 처음 출간됐을 때 책을 보니 아이들을 설레게 하는 요소가 많고 구성도 탄탄해 히트칠 것이라 직감했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시리즈는 일본에서 과학 만화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한자, 세계사 등 다양한 분야의 만화가 쏟아지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만화 강국이지만 학습 만화로는 일본 역사를 다룬 책 정도가 있다고 한다.

아오키 야스유키 아사히신문출판 사장은 “출판계가 불황인데 ‘살아남기’ 시리즈는 최근 3, 4년간 해마다 100만 권씩 판매돼 놀라울 뿐이다”고 말했다. ‘물 부족…’은 초판만 9만 권을 찍었다. 대부분의 일본 초등학교 도서관에는 ‘살아남기’ 시리즈가 비치돼 있다. 하지만 예약자가 많아 곧바로 빌려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수업 전 5∼10분 학생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책을 읽는 시간이 있다. 일반 만화책은 안 되지만 ‘살아남기’ 시리즈는 허용하고 있다. 나카무라 본부장은 “해마다 이 시간에 많이 읽은 책 순위를 발표하는데 ‘살아남기’ 시리즈는 늘 2, 3위에 오른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가 인기를 끌자 판형과 내용을 그대로 모방한 책까지 나오고 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한 작가는 “일본 만화를 보며 자랐는데, 내 작품이 일본에서 이토록 사랑받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도쿄=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