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곽박(郭璞·276∼324)은 중국 동진 사람이다. 박학다식하여 많은 자료를 남겼다. 그가 남긴 자료 중에 ‘홍어’는 ‘분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1400년 후 조선의 선비 성호 이익(1682∼1763)은 ‘분어=홍어=속칭 가올어=가오리’라고 설명한다.
성호 이익도 홍어와 가올어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에 바로 ‘가올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가올어는 생김새가 홍어와 비슷하나 맛은 훨씬 못하다. 꼬리 끝에 침이 있어 사람을 잘 쏘는데 독이 아주 심하다. 꼬리를 잘라서 나무뿌리에 꽂아 두면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는다. 본초(本草)에는 꼬리로 독을 뿌리는 것은 홍어라고 하였으나, 가올어다. 세속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이다”
홍어와 가오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중국 양나라의 고전 ‘문선’을 들어 홍어를 설명한다. “장거홍어(章巨]魚)란 것은 생김새가 둥그런 부채 같으면서 비늘이 없고 빛깔이 검붉으며 입은 배 아래에 있고 꼬리는 몸보다 길다. 홍(])은 혹 공(공)자로도 쓰이며, ‘문선(文選)’에서 이야기하는 분어(분魚)다. 상고하건대 … 홍어는 곧 가오리(加五里)다.”
홍어는 ‘洪魚’로 표기하지만 예전에는 ‘]魚(홍어)’ ‘공魚(공어)’로도 표기했다. 홍어는 둥글고 큰 물고기다. 인평대군 이요(1622∼1658)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코끼리를 보고 “다리는 큰 기둥만 하고 귀는 홍어(洪魚)와 같다”고 표현했다.
조선 후기까지도 홍어와 가오리를 혼동하는 일이 잦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정조 4년(1780년) 사절단 일행으로 중국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남겼다. 그는 중국 어린아이들이 조선사절단을 보고 ‘가오리(高麗)’라고 부르자 농으로 “우리를 보고 ‘가오리(哥吾里)’라고 부르니 우리가 곧 홍어”라는 글을 남겼다.
조선후기 문인 김려(1766∼1822)는 “귀홍(鬼공·귀공)은 일명 가짜 홍어(공魚)다. 모습이 홍어와 아주 닮았다. 색깔은 누렇고 큰 놈은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크다. 비린내가 심하고 독이 있어서 먹지는 못한다”고 했다. 독을 강조하니, 가오리로 추론할 수 있다.
전라도 화순, 경상도 김해 등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이학규(1770∼1835)는 “홍어를 잘라놓으니 그 모습이 마치 꽃뱀을 잘라놓은 듯하다”고 했다(낙하생집). 홍어의 붉은빛이 꽃뱀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나 잠깐의 벼슬살이 후 낙향해 여생을 향리에서 보냈던 권극중(1585∼1659)도 홍어에 대한 시를 남겼다. “남국의 아름다운 모습/광주리에 담긴 최고의 맛/홍어는 바다의 신선한 맛이고/시골의 술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네/대나무 숲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니/어제 내린 눈이 갠 후 매화가 아름답다”(청하집).
철종 3년(1852년) 9월 중국 상선이 표류해 조선의 관리들이 배를 수색하던 중 홍어를 발견한다. 중국 상인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홍어, 대구 등을 싣고 여기저기서 판매한 후 금주로 향하던 중 표류하게 되었다”고 기술한다(각사등록). 중국인들도 홍어를 먹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