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재명 기자
하나같이 국민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대형 정치 이벤트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여권 수뇌부 회동에서 남은 건 샥스핀과 송로버섯 등 고가 메뉴에 대한 뒷담화뿐이다. 사면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개각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를 위해 실시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런 메시지도, 감동도 남기지 못했다. 광복절 경축사는 어떤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 감옥’이 아닌 ‘하얼빈 감옥’이라고 잘못 말해 망신만 당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송로버섯 가루를 대접하는 대신 이정현 대표의 ‘통 큰 사면’이나 ‘탕평 개각’ 요청을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중요한 정치 이벤트를 모두 소진한 뒤 나온 게 19일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한 청와대의 불호령이다.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감찰 내용을 유출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특별감찰관이 ‘국기 문란자’인지는 검찰이 밝힐 것이다. 중요한 건 청와대가 친히 정국을 ‘기(起)-승(承)-전(轉)-우병우’로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정무 기능의 부재는 현 정부의 독특한 DNA다. 박 대통령은 애초 정무 기능을 정치권의 ‘짬짜미’ 창구쯤으로 여긴 듯하다. 이런 인식은 정무수석 인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정현 후임 박준우, 조윤선 후임 현기환 임명까지 공백 기간만 각각 63일, 53일이다. 박 대통령이 정무수석 공백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정무수석에게 늘 ‘오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역대 정부와 달리 책사나 전략가 지위를 박탈당하고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격하된 셈이다.
대신 정무가 빠져나간 권력의 빈자리를 채운 게 민정(民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민심 동향 전달 기능이 빠진 사정(司正)이 권력의 안방을 차지했다.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정무와 달리 사정은 통합진보당 해산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니 얼마나 대견했겠나.
정치가 사라지고 민정이, 그것도 민정의 한 부분인 사정이 과도한 권력을 누릴 때 나타난 현상은 권력 한 축의 박탈감과 소외감이다. 더욱이 정치에서도 박 대통령은 보수를 친박(친박근혜)으로, 친박을 진박(진짜 친박)으로 자신의 우군을 축소시켰다. 정치적 우군은 쪼그라들고, 권력의 한 축은 튕겨 나가면서 소외된 옛 ‘박근혜 지지층’은 박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간신(奸臣)’ 찾기에 나섰다. 그게 우 수석이다. 돈과 권력, 재능을 모두 갖춰 국민의 박탈감을 자극하기 좋은 데다 업무 스타일도 저돌적이니 딱 들어맞았다.
청와대의 말처럼 부패한 유력 신문사가 권력과 뒷거래를 하려다가 심기가 뒤틀려 ‘우병우 죽이기’에 나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왜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우 수석을 물고 뜯느냐가 핵심이다. 우병우 죽이기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의 합작품’이라면 우 수석을 지켜야 할 건전 보수 세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청와대의 이런 표피적 인식은 정무 기능의 부재를 다시 한번 증명한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