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를 거치며 한국미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은 석굴암.
1907년경 경주 토함산 깊은 곳에서 석굴암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인들의 눈에 띈 것이다. 당시 석굴암은 적잖이 무너진 상태였지만 일본인들은 석굴암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놀랐다. 소식을 전해들은 소네 아라스케 통감이 1909년 석굴암을 순시했다. 그는 건축가 세키노 다다시에게 현지 조사를 의뢰했다. 세키노는 석굴암을 걸작으로 높이 평가했고 이후 1910년대 석굴암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조선미술대관’ ‘조선미술사’와 같은 책, 국학자 안확의 글 등에서 석굴암이 부각되었고 민예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영원의 걸작”이라고 상찬했다. 이에 힘입어 1920년대 석굴암 여행 붐이 일었다. 대중이 석굴암에 매료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석굴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물론, 석굴암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석굴암을 답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07년 당시 석굴암은 무너진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은 석굴암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음을 의미한다. 그 석굴암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고 1910년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감상의 대상, 미적인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석굴암은 이렇게 한국의 대표 문화재로 자리 잡아갔다. 석굴암의 재발견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15년 석굴암을 해체 수리했다. 그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콘크리트 돔 구조물 설치였다. 자연과 함께해왔던 석굴암을 자연으로부터 차단한 것이다. 석굴암 내부에 물이 흐르고 이끼가 끼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돔은 부끄럽게도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이어졌다. 1961∼64년 우리가 실시한 석굴암 수리 공사에서 일제의 콘크리트 돔을 철거하기는커녕 2중으로 덧씌우는 우를 범했다.
국운이 쇠하던 1907년, 석굴암은 무너진 채 우리와 다시 만났다. 그 존재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였지만, 석굴암은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