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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파리의 노숙인, 엘리트 법관과 친구가 되다

입력 | 2016-09-03 03:00:00

◇파리노숙지앵/장마리 루골, 장루이 드브레 지음/신소영 옮김/232쪽·1만3500원·필로소픽




파리의 노숙인 장마리 루골(왼쪽)과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 필로소픽 제공

프랑스 파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노숙인을 볼 수 있다. 함께 지내는 개의 목걸이에 ‘배고파요’라고 쓰인 팻말을 걸어 놓고 동정심을 유발하는가 하면, 낚싯대에 컵을 매달아 행인들이 주는 동전을 낚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르몽드지를 읽고 철학 논쟁을 즐기는 인텔리 노숙인도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장마리 루골도 20년이 넘도록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이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샹젤리제 거리에서 구걸하던 중 자전거를 타고 와서 쇼핑을 하려던 한 남자에게 자전거를 지켜주겠노라 제안한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던 이 사람은 헌법재판소장 장루이 드브레였다.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돈독한 신뢰와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노숙인의 삶을 통해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싶었던 드브레는 그에게 책을 쓸 것을 권한다. 맞춤법도 잘 모른다는 루골에게 드브레는 단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충고한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 것!’이다. 그렇게 루골은 2년여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두꺼운 공책 세 권에 써내려갔다. 드브레와 루골은 몇 달 동안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며 공동 교정 작업도 해나갔다. 프랑스에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헌법재판소장과 노숙인이 함께 TV 토크쇼에도 출연하는 등 화제를 낳았다.

루골이 들려주는 파리의 거리 생활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는 유머가 넘친다. 그는 쇼핑하는 사람들에게 주차 단속이 뜰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고, 자전거도 지켜주면서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제법 잘 알려졌다. 그는 거리에서 만났던 가장 끔찍했던 사람이 배우 알랭 들롱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는 차갑게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이 책에서는 거리에서 만나는 행인들로부터 당한 모욕과 욕설, 경멸, 혐오, 무례, 차별의 경험도 민낯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거리의 생활에 대해 “자유롭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는 책을 출간한 후 인세를 받고 유명해졌지만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노예처럼 구속된 삶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