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이종석 기자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때의 일이다. 중국과의 경기 후 기자회견을 하던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허재에게 중국 기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 “경기 시작 전 중국 국가가 연주될 때 왜 한국 선수들은 똑바로 서 있지 않고 몸을 움직였느냐.” ‘열혈남아’ 허재,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짜증나게.” 그러고는 일어서서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다. 통역은 허재의 말을 “노코멘트”로 옮겨 전달했다. 중국 기자들은 “고 백 홈(Go back home)” “바이 바이(Bye bye)” 하면서 기자회견장을 나가던 허재의 뒤통수에 대고 야유를 날렸다.
국제대회에서 중국 기자들이 질문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나한테 한 질문은 아니지만 필자도 한국 사람인지라 저런 말을 들으면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나라 선수나 감독한테도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때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힘없는 나라였다고 생각해 한국 선수에게만 저러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저런 질문이 나오는 ‘타이밍’은 따로 있다. 중국이 한국보다 잘했을 때다. 중국 국가가 연주되는데 어쩌고저쩌고 했던 질문도 중국이 4강전에서 한국에 이긴 뒤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며칠 전 중국은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에 또 졌다. 이로써 중국은 한국과의 상대 전적이 1승 12무 18패가 됐다. 패하기는 했어도 세 골 차로 뒤지다 두 골을 따라붙어 그런지 중국 선수들이 그렇게 풀이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36세로 중국 대표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정즈는 “원래 공한증은 없었다. 이번 경기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원래 없었다”고 하는 공한증은 한국이 아니고 중국의 언론과 축구 팬 사이에서 먼저 나온 말이다. “이번 경기로 자신감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경기를 보면 딱히 그럴 일도 아니다. 한국이 중국을 많은 점수 차로 이겼던 적이 없다. 매번 한두 골 차였다. 한국은 18번의 승리 중 한 골 차로 12번, 두 골 차로 6번을 이겼다. 간신히 이겼든, 질 뻔하다가 이겼든, 어쨌든 이기고 마는 그런 게 실력이다. 당하는 쪽 처지에서 보면 이런 경우에 오히려 속이 더 뒤집힌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된다. 될 듯 될 듯하다가 결국엔 넘지 못해 주저앉고 만다. 이런 게 실력 차다.
중국축구협회가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의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을 앞두고 중국 관중 몫으로 입장권 5만 장을 요구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역시 중국답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전체 좌석 수가 6만6706석이다. 5만 장이면 홈팀 경기장의 75% 이상을 중국 관중으로 채울 생각을 했다는 얘기다. 이런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축구협회가 세상에 몇 곳이나 되겠나. 대한축구협회는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며 1만5000장을 중국 관중 몫으로 돌렸다.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나온 저런 질문이나 요구가 아니더라도 중국이 외교, 군사, 경제 분야 등에서 목에 힘주고 상대를 윽박지르는 듯한 인상을 남길 때가 종종 있다. 아직까지는 중국이 한국 축구를 향해 험한 말을 못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험한 소리 안 들으려면 실력이 더 세야 한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