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책 내용을 요약한 긴 제목들이 많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도 1859년 처음 나올 때 ‘자연선택이라는 수단 또는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였다. 오늘날 출판시장에서 제목(title)은 출간 시기(timing), 대상 독자(target)와 함께 책 판매 흥행의 ‘3T’ 요소 중 하나이지만 옛날에는 제목에 대체로 무심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글자 그대로 ‘역사기록’을 뜻하는데 처음엔 그냥 사마천의 벼슬에서 따온 ‘태사공서(太史公書)’, 즉 ‘태사공이 쓴 책’이었다. 선비들의 문집도 정도전의 ‘삼봉집’, 이황의 ‘퇴계집’처럼 그저 호(號)를 붙였다. 그렇다고 동양의 옛 책 제목들이 다 심심한 건 아니다.
미국 사상가 리 호이나키(1928∼2014)는 정년 보장 교수직을 버리고 농부가 되어 소비주의 사회에서 벗어난 삶을 실험했다. 그의 경험과 성찰을 담은 저서의 제목 ‘정의(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Stumbling Toward Justice)’는 돌밭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의를 향해 걷겠다는 결의이자, 그런 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들 두 책은 모두 책의 주제와 성격, 저자와 편찬자의 의도와 진심을 잘 표현했으며 제목의 뜻만으로도 울림이 크다. 책도 상품이기에 제목부터 독자의 눈길을 잡아끌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재치와 기발함이 지나치면 과장과 허위로 흐른다. 진실하고 정직한 제목을 알아보는 진실하고 정직한 독자들은 여전히 많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