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사고로 하루에 365명이 죽은 사건과 1년 동안 매일 한 명씩 죽은 사건 중 어느 것이 더 불행한 일일까. 물론 당신은 같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인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시판된 이래, 지난 20년여 동안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피해자도 수천 명에 달한다. 더구나 많은 사망자들이 산모와 영유아였다. 이 제품을 한 번이라도 사용한 사람이 수백만 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피해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끔직한 대형 사고임에도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아 왔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을 가습기에 넣어 분무하는 바람에 폐에 심각한 손상이 생겨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최근 관련 청문회에서 우리는 진저리나게 익숙한 모습을 본다. 제조사인 옥시레킷벤키저 측 인사들은 대부분 불참했다. 참석한 사람들도 대개 발뺌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역학조사로 원인이 규명된 것은 2011년이었지만 아직까지 이 일로 처벌받거나 보상받은 사람은 없다.
사회에서 신뢰는 중요하다. 당신이 거래를 할 때마다 받은 돈이 위조지폐가 아닐지 걱정해야 한다면 사회는 붕괴될 거다. 하지만 신뢰는 무조건적인 믿음에서 오지는 않는다. 수많은 비리가 잘못된 믿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달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을 두고, “우리를 믿어 달라. 부정한 대가를 받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로 호소하는 것은 난센스다. 이런 법이 필요 없을 만큼 신뢰가 쌓이기까지 규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합리적 의심은 신뢰를 쌓아가는 핵심 요소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놓고도 의심한다. 결과가 놀라울수록 더욱 그렇다. 실험실에 갓 들어온 대학원생들은 날마다 노벨상을 받을 만한 결과를 발견한다. 호들갑 떠는 신참의 말에 선배는 심드렁하게 이것저것 확인할 리스트를 말해 주기 마련이다. 그의 노벨상은 곧 물거품이 된다. 근대 철학을 연 것도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된다. 충분한 의심을 통과한 과학 이론에만 법칙이라는 신뢰가 주어진다.
우리가 법과 제도를 만들고 조약과 계약을 하는 것은 상대를 믿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마치 과학자가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 다듬어가듯 신뢰를 높이기 위함이다. 합리적인 사회는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물질적 증거를 보여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의 의심은 생명을 지킬 만큼 충분치 못했다. 여기에는 그런 제품 판매를 허가해 준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지만 “의도가 뭐냐”며 합리적 의심조차 거부하는 사회의 고질적 문제가 바탕에 있을지도 모른다.
옥시의 과학자들은 제품의 유해성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를 제기한다. 옥시의 과학자들이 제품 생산을 막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가 자신이 하는 일의 사회적 결과에 대해 과학적 의심을 하지 않을 때, 그 과학은 재앙이 될 수 있다.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