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약용식물의 하나로 꼽혀 온 울금.
황광해 음식평론가
‘귀한 울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선조 36년(1603년) 1월 3일(음력), 당상관과 종6품 낭청이 동시에 파직된다. 죄목은 간단하다. 제사 지내는 일을 불경스럽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사헌부의 보고다.
선조는 보고 내용대로 파직을 결정한다. 울창주는 각별한 술이다. 검은 기장으로 술을 빚고 울금을 달여 넣어 색깔을 낸다. 울창주는 붉은 호박(琥珀)과 같이 아름다운 색깔이다. 울창주는 궁중의 제사에 사용했다. ‘심황’은 울금과는 다르다. 심황은 강황으로 추정된다.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에서 ‘(울금은) 매우 향기롭지는 않으나 기운이 가벼워 술기운을 높은 데까지 이르게 하므로 신을 내려오게(降神) 할 수 있다. 물에 씻은 후 불에 쬐어 말려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산림경제’의 원본에는 한자로 ‘鬱金’이라고 쓰고 곁에 한글로 ‘심황’이라고 작게 적었다. ‘울금=심황’이다. 불과 50여 년 전에는 울금 대신 심황을 사용하다가 고위 공직자가 파면되었는데 ‘산림경제’에서는 버젓이 ‘울금=심황’이라고 표기했다. 혼란스럽다.
문신 이수광(1563∼1628)은 더 엉뚱한 기록을 남겼다. ‘본초도경에 따르면 강황은 3년을 넘긴, 오래 묵은 생강이다. 속언에 생강이 3년을 넘기면 꽃을 피운다고 했다’고 적었다(지봉유설). 생강과 강황은 전혀 다르다. 이수광이 근거로 삼은 ‘본초도경’은 중국 송나라 때인 1061년에 간행된 의서다. 이수광의 시대보다 500년 앞선다. 울금, 강황, 심황, 생강에 대한 혼동은 오래 묵었다.
조선시대 내내 ‘울금’은 귀하게 사용했다. 울금은 ‘음(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고 음의 성질을 지닌 귀신을 부르는 데 적합하다고 믿었다. ‘상변통고’에서는 “제사를 모시기 전에 울창주를 땅에 붓는 것은 울창주에 담긴 울금의 냄새를 이용하여 신,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울창주는 주로 왕실의 귀한 제사에 사용했으나 울금을 넣어 색깔을 낸 울금주는 왕실이나 민간 모두 귀하지만 널리 사용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사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경모궁의궤’에도 “(제사상에) 울금주 1병, 청주 4병 반을 올렸다”고 했다.
난릉은 지금의 중국 장쑤(江蘇) 성 창저우(常州)로 울금주의 명산지다. 이태백(701∼762)의 울금주는 시 ‘객중행(客中行)’에 나온다. ‘난릉 지방 좋은 술엔 울금이 향기롭고, 옥잔에 가득 담아내니 호박색이 빛나느니.’
울창주, 울금주가 귀하니, 울금도 귀하게 여겼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1420∼1488)도 울금을 노래한다. ‘늦은 봄 황폐한 정원 울금을 심었나니/죽죽 자라 오월에 산발처럼 더부룩해지기를/가을 오면 장차 천 길이나 높이 자라/비바람 소리 속 봉황의 노래를 들으리…뒤뜰에 일찍이 울금향을 심었더니/잎은 파초만큼 크고 열매는 생강만 하네.’(사가시집)
울금, 강황, 심황은 염료로도 귀하게 사용했다. ‘울금포(鬱金袍)’는 울금을 이용하여 황색으로 물들인 옷이다. 황색은 중국 황제의 색깔이다. 울금포는 제왕의 도포다.
울금은 덩이뿌리이고 강황은 뿌리줄기다. 모두 카레의 재료로 쓴다. 사람들이 혼동하지만 둘은 서로 다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