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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의 휴먼정치]이정현의 스크린 골프

입력 | 2016-09-08 03:00:00


박제균 논설위원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2012년 12월 19일. 오후 4시쯤 문재인 후보가 승기를 잡았다는 가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돌았다. 당시 박근혜 후보 공보단장이던 이정현은 실망한 나머지 집으로 가버렸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놈, 지금 자고 있을 때냐”는 목소리가 들려 번쩍 잠에서 깨 보니 박 후보가 승리했다는 진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었더란다.

여의도만 가면 왜?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박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들어간 이정현 수석비서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었다. 귀가 직전 혼자 즐기는 스크린 골프였다. 그 얘길 들으면서 ‘박근혜 정부 실세의 스크린 골프라, 참 이정현스럽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집권당 최고위원과 대표가 된 뒤에도 마을회관이나 군대 내무반에서 아무렇게나 자는 그는 어쩌면 특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 대표가 5일 첫 국회 연설의 일성(一聲)으로 국회의원 특권 개혁을 부르짖은 것은 울림이 있다. 이 대표는 연설에서 “처음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선배의원들 따라 하다 보니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말의 속도와 말투조차 달라졌다”고 토로했다. 초선 의원들은 과거 운동권의 ‘의식화 교육’ 못지않은 ‘특권화 교육’ 과정을 거친다. 공개석상에서는 ‘존경하는 ○○○ 의원’이라고 부르지만 커튼 뒤에서는 철저하게 선수(選數) 순이다.

재선은 돼야 상임위 간사가 돼 관련부처에 말발이 커지고 3선이라야 상임위원장을 맡아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초선은 당선될 때는 천하를 얻은 것 같지만, 과거엔 다선(多選)들 눈치 보여 의원 사우나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지역구 의원의 비례대표 하대(下待)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죽하면 18대 비례대표를 지낸 박선영 전 의원이 ‘무수리’라고 표현했을까. 그렇게 다져지는 나름의 위계(位階)는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하는 콘크리트 역할을 한다. 똑똑해 보이던 사람이 여의도에만 입성(入城)하면 이상(?)해지는 이유는 단단한 특권화 교육 과정이 만드는 ‘집단적 사고’에 빠지기 때문이다.

최근 국회에서 국민통합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국회의장이 인사말만 하고 떠난 것은 이해되지만, 토론자였던 여야 의원도 중간에 자리를 뜨거나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방청석에서 “토론 주제가 국민통합인데, 여야 의원부터 한자리에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니 국민통합이 되겠느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얼굴만 들이밀고 가는 국회의원만 욕할 일도 아니다. 국회의원급은 되는 사람이 참석해야 행사의 격이 올라간다고 믿는 이 사회의 속물근성이 뒤늦게 나타나 일찍 떠나는 결례를 범해도 괜찮다는 특권 의식을 키운다. 우리 안의 ‘특권 선망’부터 내려놓아야 셀프 개혁이 사실상 불가능한 ‘특권 내려놓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단단한 ‘특권화 교육’

어느 사회든 특권계층은 있게 마련이다. 사회가 특권을 용인하려면 특권층의 자기희생이 선행돼야 한다. 자기희생은커녕 고급 외제차에 대박 주식도 모자라 남의 돈으로 내연녀에게 줄 오피스텔 선물까지 챙기는 특권층을 보면 자식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하기야 다른 정부 같으면 열두 번도 바뀌었을 사람이 아직도 청와대 핵심 요직을 지키며 ‘특권의 끝판왕’으로 군림하는 한 특권 개혁은 요원하다. 정녕 이 나라에 미래가 있는가.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