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보통 아이들의 크레파스는 12색이나 16색이었는데, 창윤이 것은 24색이었다. 금색도 있었다. 늘 너무 시커메서 별로 쓸모도 없는 금색을 왜 넣어 놨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색깔 하나가 주는 부자의 느낌은 강렬했다.
부잣집은 수박 먹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났다. 보통 집들은 수박을 꼭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수박을 가르고 숟가락으로 수박을 떠서 물에 띄운 다음 설탕을 넣어 단물을 만들어 한 대접씩 퍼줬다. 창윤이네에 가면 방학생활 표지에 나온 것처럼 반달 모양으로 잘라서 줬다. 설탕물 맛이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수박 맛은 그 집에 가야 맛볼 수 있었다. 여느 집들은 수박 껍데기의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초록색 부분을 깎아내고 남은 하얀 속살을 노각처럼 무쳐먹었는데 창윤이네는 수박 껍데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자 뒷간이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나온 다음에 가는 거라고 했다. (중략) 똥마려운 것까지 안집한테 양보해야 된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엄마는 한술 더 떠서 “너를 데려오면서 안집한테 얼마나 눈치가 보인 줄 아니? 방 얻을 때 두 식구라고 했거든. 주인집도 네 또래들이 있으니까 싫어할 것 같아서” 이러는 게 아닌가. 속일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있는 자식을 없는 척할 수가 있을까. 그 잘난 우리 엄마가?’
여덟 살짜리 계집아이의 세상 보는 눈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다. 싱아는 누가 다 먹어치웠는지 몰라도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의 향기는 오늘도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김창완 가수·탤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