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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흑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입력 | 2016-09-10 03:00:00

◇세상과 나 사이: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타네하시 코츠 지음/오숙은 옮김/248쪽·1만3800원·열린책들




납치돼 노예로 팔려간 흑인 음악가의 실화를 그린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경찰의 총에 의해 장성한 아들을 잃은 프린스 존스의 어머니는 “영화 ‘노예 12년’처럼 인종주의자의 행동 하나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절규했다. 동아일보DB

“나는 매일 아침 흑인 노예들이 지은 집(백악관)에서 눈을 뜹니다.”

올해 7월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셸 오바마 여사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건설에 흑인들의 노동력이 단단히 한몫했음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15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흑인으로 미국에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적나라하게, 그러나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흑인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값싼 ‘천연자원’이었다. 법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이지만 흑인의 목숨은 길거리에서 쉽게 증발한다. 무허가로 개비 담배를 팔다 경찰에게 급소를 눌려 숨진 에릭 가너, 장난감 총을 지닌 채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12세의 타미르 라이스….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차다.

이 책은 인권을 부르짖는 나라, 흑인이 대통령까지 된 나라가 인종 갈등으로 왜 갈수록 극심한 진통을 겪는지에 대한 의문을 차갑게 풀어준다.

저자는 11세 때 길에서 아무 이유 없이 권총으로 자신을 겨냥하는 백인 소년을 보며 너무나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얼어붙는다. 한 백인 여성은 극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빨리 타지 못하는 저자의 어린 아들을 밀치며 ‘아 쫌!’이라고 내뱉는다. 화가 난 저자가 격한 말을 하자 한 백인 남성은 “당신을 체포하게 할 수도 있어”라며 여성을 거든다.

흑인 부모들은 자녀에게 두 배로 노력하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산층 이상으로 진입하면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대학 동기인 프린스 존스가 2000년 경찰의 총에 숨진 경험은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경찰은 키 165cm, 몸무게 113kg의 남자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프린스의 키는 192cm, 몸무게는 96kg이었다. 어머니가 박사였고, 교외의 마당 있는 집에서 살던 존스는 성실한 청년이었지만 검은색 피부는 끝내 그를 허망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2001년 9·11테러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장면을 직접 목도한 저자가 그라운드 제로는 과거 흑인 노예를 경매하던 곳이었음을 떠올린 건 존스의 죽음과도 무관치 않다.

흑인에 대한 시선은 동성애자, 아웃사이더 등 소수 집단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갈파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차별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혐오하는 사람에게 이방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부족 내에서 우리를 확인받는다’는 것. ‘증오가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문장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려준다. 섬뜩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의 아들은 2014년 무장하지 않은 18세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편의점에서 엽궐련 몇 갑을 훔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뉴스를 본 후 방으로 들어가 흐느낀다. 그는 말한다. “이것이 너의 나라다. 너는 이 모든 것 안에서 살아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저자는 시종일관 냉정하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멈출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래도 투쟁은 필요하단다. 암담하지만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라며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조명을 내리꽂는 듯하다. 지난해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챙겨 간 책이다. 원제는 ‘Between the World and Me’.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