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라오스로 간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현지 교민 행사에서 갓난아이에게 입을 맞추며 기뻐하고 있다. 교민들이 두테르테의 모습을 셀카로 앞다퉈 찍고 있다. 사진 출처 마닐라불러틴
최영해 국제부장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71)이 지난주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참석차 라오스에 가 필리핀 교민들과 만나 이렇게 호소했을 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떠올랐다. 독일 정부로부터 차관(借款)을 얻기 위해 광원과 간호사를 파견한 박 대통령은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들을 만나 연설하다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박 대통령 부부와 파독 광원, 간호사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21년 독재에 억압받고,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민주정부를 수립했지만 엘리트 가문의 과두(寡頭) 정치는 민중들을 소외시켰다. 빈곤과 실업, 토지개혁 문제를 풀지 못한 아시아의 빈국 필리핀.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이역만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교민들을 보면서 가슴 아프기는 박 대통령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마닐라에서 한참 떨어진 남부 민다나오 섬의 사고뭉치 동네였던 다바오 시 시장 출신인 두테르테는 고향에서 마약을 뿌리 뽑고 공산주의 반군(叛軍)을 소탕해 안전한 동네로 만들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욕설을 해대는 것은 단지 말실수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잘 짜인 그만의 리더십 스타일이라고 싱가포르에 있는 동남아연구소(ISEAS) 맬컴 쿡 박사는 분석했다.
외신들은 두테르테를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 ‘필리핀의 트럼프’라 부르며 거친 말을 잇달아 타전(打電)하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그의 개혁적인 경제정책에 기대를 건다. 두테르테의 경제정책은 전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다. 법인세와 개인소득세를 대폭 낮추는 세제개혁을 하고, 농민 보호를 명분으로 쌀 수입을 제한하던 조치를 풀어 태국과 베트남보다 비싼 필리핀의 쌀값을 낮추기로 했다. 곳곳에 항구를 만든다는 플랜도 내놨다. 수시로 정전되는 열악한 전력망을 손보고 마닐라에 하나뿐인 광역전철을 민다나오 섬에도 깔겠다고 한다. 도로를 닦고 전봇대를 세우고 전철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과 흡사하다.
필리핀 대통령 임기는 6년 단임으로 두테르테의 임기는 이제 3% 정도 지났다. 온갖 막말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대통령의 언사가 엘리트들의 고상한 언어가 아니라 서민들과 같은 욕설을 쓰는, 공감할 줄 아는 대통령이라는 데 열광한다. 마닐라 시내 곳곳엔 ‘두테르테에게 한 표를’이라는 선거 벽보가 아직 내걸려 있다. ‘두테르테’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티셔츠를 입은 경찰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군인들은 “두테르테가 진정한 최고사령관”이라며 환호성을 지른다. 국민들이 두테르테식 공포 정치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열악한 경제 상황과 취약한 안보 때문이다.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와 건강,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민주정부보다는 강력한 철권통치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두테르테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중국에 손을 벌려 경제개발 자금을 얻어야 할 처지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대미 관계도 불안한 형국이다. 싱가포르의 스트레이트타임스는 10일 사설에서 “입으로 사격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지만 자신의 발에 총을 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며 경솔한 발언을 꼬집었다. 이 신문은 “지금은 국민들과 허니문 기간이지만 독재자를 축출한 역사를 자랑하는 필리핀에서 언제 분위기가 바뀔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기술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 필리핀이었지만 지금은 국민소득이 한국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대가가 그만큼 혹독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성공 여부는 망가진 경제를 얼마나 살려 놓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대로 트럼프가 될지, 아니면 박정희가 될지 평가하기엔 아직은 일러 보인다.
―마닐라에서
최영해 국제부장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