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돈을 갹출해 아이돌의 앨범 발매나 데뷔를 돕는 웹사이트.4개 언어로 서비스하고 있다.화면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광고 앱을 막 깔아. 그러면 돈처럼 쓸 수 있는 걸 주거든. 급하면 돈 주고 사든가. 난 저번에도 5만 원인가 했어.”
여학생들이 뭔가 험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닐까 싶어 유심히 들여다봤다. 사정은 이랬다. 그들은 아이돌의 팬이었다. 어떤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아이돌을 향한 나의 ‘마음’을 적립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은 1000원부터 돈 주고 살 수 있는데 돈이 없어도 방법은 있다. 앱 제작사의 협력업체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하면 건당 얼마씩 모을 수 있다는 것. 이 돈은 아이돌의 생일이나 데뷔기념일에 각종 이벤트를 위해 쓰인다. 해당 앱에서는 인기 아이돌의 생일이 며칠 남았는지, 목표액은 얼마고 참여한 팬은 몇 명인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최근 ‘글로벌 한류 크라우드펀딩’을 표방하며 탄생한 어느 웹사이트에서는 더욱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선 아이돌의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팬들이 분주하게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한 신인 여자 아이돌은 ‘싱글앨범 발매 프로젝트’ 모금액 목표치로 1000만 원을 잡았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1025만 원을 모았다. 팬들은 최소액인 1000원을 내면 명예제작자 증서와 감사인사 영상을 받고, 가장 큰 액수인 100만 원을 내면 추가로 연예인의 손 편지, 식사 팬미팅 초대권 1장을 받을 수 있다. 단, 연예인이 해외에 있으면 화상통화로 대체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애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 모두 겉포장은 그럴싸하다. ‘올바른 팬 서포트 문화를 선도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표방하고 ‘한국의 아이돌(가수), 배우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총망라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지향한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돈’이다. 합리적인 듯하면서도 어쩐지 ‘호갱’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옆자리에서 열심히 ‘마음’을 적립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데 문득 1997년이 떠올랐다. 나 역시 지금은 데뷔 20주년을 맞은 아이돌의 팬이었다. 그땐 ‘빠순이’로 불릴지언정 팬 활동은 꽤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을 향한 마음은 굳이 표현해야 할 이유도 몰랐지만, 큰 마음먹고 표현해봤자 공개방송 따라가기나 공연 티켓을 사는 정도였다.
최근 들어 아이돌 팬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일고 있다. 아이돌을 향한 팬심을 소재로 한 소설책이 문학상을 받고, 여기저기서 뒤늦게나마 빠순이 옹호론을 펼친다. 비뚤어진 10대들의 일탈쯤으로 폄하되던 팬 문화는 이제 대중문화의 어엿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제3의 문화 권력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이렇듯 팬이 ‘빠순이’를 지나 ‘팬덤’이라는 우아한 단어로 격상한 시대, 그 팬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현금화하기 위한 노력 역시 갈수록 교묘해진다. ‘팬 크라우드펀딩’ ‘팬 서포트’처럼 어쩐지 있어 보이고 그럴싸한 말들이 더 공허하고 씁쓸하게 들리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