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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원자폭탄, 과거와 현재

입력 | 2016-09-12 03:00:00


한수산의 장편소설 ‘군함도’는 일제 말기 일본 하시마로 끌려가 석탄을 캐는 징용자들의 사연을 다뤘다. 일제는 징용자들을 ‘징용에 기쁘게 응한 사람들’이라며 응징사(應徵士)라고 불렀다. 이들은 미쓰비시광업이 소유한 하시마의 30도가 넘는 해저탄광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죽도록 일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일부 징용자는 목숨을 걸고 ‘지옥섬’을 탈출해 배로 50분 거리의 나가사키로 숨어든다.

▷나가사키의 미쓰비시중공업 조선소와 병기제작소로 흘러들어간 징용자들을 기다린 것은 원자폭탄 ‘팻맨(Fat Man)’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뭔지 모를 신가타(新型) 폭탄이 떨어져 피해가 엄청나다는 소문이 나가사키까지 퍼졌다. 3일 뒤 미군은 팻맨을 나가사키 북쪽의 고쿠라에 떨어뜨리기 위해 출동했다. 이곳에서 공습경보에 놀란 일본인들이 콜타르를 태워 연기를 피워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육안으로 투하 지점을 확인 못 한 B29는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렸다.

▷팻맨은 반경 15m를 30만 도의 불덩어리로 만들었다. 끓어오른 땅의 온도는 3000∼4000도였다. 폭심지에서 4km 안에 있는 사람들은 증발하거나 옷과 살갗이 녹아 버렸다. 목이 탄 피투성이 부상자들은 몸통과 붙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린 채 마실 물을 찾아 헤매 다녔다. 한수산은 피폭 부상자에 관한 일본 자료를 번역하던 아내와 딸이 “도저히 못 하겠다” “밥을 못 먹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그해 나가사키에서 숨진 7만여 명 중 2만여 명이 징용자를 포함한 한국인이었다. 일본 구호대는 ‘아이고 아이고’ 신음하는 한국인들은 제쳐놓고 ‘이타이 이타이’라고 하는 부상자들에게 달려갔다.

▷징용자들 일부는 부상자 구조와 시신 처리에 나섰다. 한수산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강조한다. 북한 김정은의 5차 핵실험으로 한미 못지않게 한일 공동 대응이 절실해졌다. 북핵 위협에 맞서 일본과 공조하는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손잡고 인간의 길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한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