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등기이사직 맡기로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아직 아버지가 입원 중인 상황임을 감안해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것을 고사해 왔지만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더군다나 ‘갤럭시 노트7’ 사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여서 더는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 상황 회피 대신 ‘조기 등판’
우선 ‘갤럭시 노트7’ 리콜 사태부터 해결해야 한다. 미국 정부 당국의 예상치 못한 초강수 사용 중지 권고에 따라 앞으로 피해자들의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적에 대한 부담도 고스란히 안게 된다. 삼성전자는 이번 리콜로 당초 손실액을 8000억∼9000억 원으로 예상했지만 미국 정부기관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를 잇달아 발표함에 따라 피해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는 삼성SDI나 삼성전기 등 삼성그룹 계열 부품회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발병 이슈와 관련한 잡음도 여전히 끊이질 않고 있다.
이 부회장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까지 기다리지 않고 굳이 ‘조기 등판’하기로 한 것은 회사 안팎으로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위기 때 정공법을 택하는 것은 이 부회장의 평소 성향과도 일치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6월 메르스 사태가 확산됐을 때에도 예상을 깨고 직접 대(對)국민 사과 회견을 열었다.
등기이사가 되면 회사 운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이고 보수가 5억 원 이상일 경우 매년 연봉도 공개해야 한다.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려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갤럭시 노트7 사태로 미국 청문회에 불려 다닐 수도 있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을 상대로 한 소송 등이 이어질 수 있지만 이 부회장이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서면 문제 해결을 더 신속하게 하겠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등기이사 선임은 이 부회장이 평소 강조해 온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부합한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대표이사(CEO)와 폴 제이컵스 퀄컴 회장을 비롯한 미국 기업 오너들은 대부분 경영에 참여하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린다. 등기이사뿐 아니라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 역시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문화다. 이 부회장도 자연스레 같은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이 부회장과 평소 친분이 깊은 존 엘칸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 회장 역시 이사회 의장이다.
○ 연말에 회장직에 오를까
이 부회장이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등기이사직을 맡게 됨에 따라 이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경영권 승계 작업도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맡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승계가 마무리됐다고 평가하긴 어렵다”면서도 “이 부회장이 대내외적으로 삼성전자를 대표해 공식적으로 다양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이 회장이 맡아온 삼성생명공익재단 및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물려받았다. 이제 남은 건 삼성전자 회장 자리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올해 연말 인사에서 이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림에 따라 앞으로 다른 계열사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이어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삼성물산의 개인 최대주주다. 재계에서는 연말에 삼성그룹을 이끌 마스터플랜을 내놓으면서 자신만의 경영색깔을 드러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