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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세형]리셴룽의 ‘스크린 정치’

입력 | 2016-09-14 03:00:00


이세형 국제부 기자

공무원 청렴도가 세계 최상인 나라, 아시아의 물류 금융 스타트업 중심지, 글로벌 기업들이 아시아지역본부와 연구개발(R&D)센터를 대거 설치한 나라…. 싱가포르의 국가 경쟁력을 상징하는 지표는 너무나 많다.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약간 더 넓은 도시 국가로 인구는 560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만2755달러(2016년 국제통화기금 기준)로 산유국인 카타르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단연 1위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바로 정치다. 경제·산업 부문과 달리 싱가포르의 정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하지도 못하는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부 대우를 받는 리콴유(李光耀·1923∼2015) 전 총리의 아들인 리셴룽(李顯龍·64) 현 총리가 권력을 ‘세습’했고, 정당 간 경쟁이나 언론의 자유도 사실상 없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방문한 싱가포르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경제성장을 이룬 리 총리 부자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한국과 미국, 유럽 언론의 자유로운 정부 비판과 치열한 정당 간 경쟁을 사뭇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치’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배울 만한 게 있었다. 바로 국민 눈높이에 맞춘 최고지도자의 연설 스타일이다. 주요 국가행사 때 리 총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열정적인 연설로 장내를 압도한다. 특히 리 총리는 대형 스크린에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띄워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지난달 21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리 총리는 싱가포르의 미래 성장동력 발굴과 혁신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자국 벤처기업인들과 이들이 만든 제품을 스크린에 띄웠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과 남중국해 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땐 지역 지도를 보여줬다. 국가 R&D 인프라 구축 계획을 소개할 땐 조감도를 띄웠고 직접 레이저 포인터로 초점을 짚어 가며 설명했다. 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싱가포르에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긴 조셉 스쿨링(남자 수영 100m 접영)에 대해 언급할 땐 스쿨링의 경기와 시상식 사진을 띄웠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여야의 유력 정치인들까지 밋밋한 벽을 배경 삼아 경직된 표정과 딱딱한 말투로 연설하는 ‘한국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국민이 체감하기 어려운 정책이나 국정 목표를 단순한 연설로 알리는 것과 직접 사진, 그림, 그래프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보여주며 설명하는 것은 전달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정책과 메시지를 통해 국민에게 평가받는다. 친절하고 이해하기 쉬운 연설은 국민을 위한 기본 서비스다. 한국도 대통령과 여야 대표들이 대국민 연설을 할 때 스크린을 활용해 이해를 돕는 문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최첨단 정보기술(IT)로 무장한 한국인들은 영상 콘텐츠를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다. 유력 정치인들이 리 총리처럼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하는 ‘스크린 정치’를 시도한다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면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불통 이미지’도 희석되지 않을까.
 
이세형 국제부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