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추석 연휴에 우리는 역귀성 길에 오른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니 명절에 서울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고향이라는 이 따뜻한 단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통영에 있는 지인들에게 “명절이라 우리도 고향 가요”라고 얘기하면서도 좀 머쓱한 기분이 든다.
우리 부모님도 그 옛날 고향 시골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셨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상경하여 형제들 줄줄이 부양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하셨고, 많은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식 교육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엄마는 아들 없는 설움을 토로하시면서도 딸자식 대학 교육은 반드시 시키는 것이 인생 목표였고, 다행히 우리는 엄마의 소망을 이루어 드렸다. 작년 봄 그런 엄마가 폐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전화를 자주 안 한다고 섭섭해 하고, 사위 준다고 꼬리곰탕을 한가득 끓이며 정성껏 명절 상을 차려내던 엄마가 사라진 서울은 고향이란 단어에서 더 멀어졌다.
우리가 처음 통영에 내려가 살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가장 반대가 심했던 이도 엄마였다. 엄마에게 서울은 가난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키워낼 수 있었던 기회의 땅이었지만 엄마가 자란 시골은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땅이었다. 우리가 통영에서 열심히 살고,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셨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설 명절을 며칠 남기고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통영에서 크게 몸살을 앓고 누워 있을 때, 조용히 현관문을 두드린 이가 있었다. 옆집 미술관 사모님이 설 명절 음식을 손수 차려서 우리 집까지 상을 들고 오신 것이다.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아들고 목이 메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기력을 차리지 못한 나를 위로한 이들도 이웃 분들이었다. 원기 회복에 좋다는 펄떡이는 학꽁치를 들고 오신 뒷집 할머니, 직접 만든 생강차를 갖고 온 옆집 애기 엄마, 정성껏 키운 과일을 한 아름 들고 온 동네 할아버지까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만 오르내리며 바쁘게만 살던 서울깍쟁이에게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은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서울이 고향이라는 단어와 그리도 어색한 조합이었는지를 깨닫게 했다. 엄마가 떠나고 없는 세상에 다시 만난 따듯한 고향. 통영은 내게 그런 곳이다.
※필자(43)는 서울에서 광고 회사, 잡지사를 거쳐 콘텐츠 기획사를 운영하다 경남 통영으로 이주해 출판사 ‘남해의봄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