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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던 소년, 세상 향해 승리의 포효

입력 | 2016-09-18 03:00:00

정호원, 패럴림픽 보치아 혼성 개인전 BC3등급 금메달




“코치님, 내가 해냈어요” 정호원(왼쪽)이 17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리오카 경기장2에서 열린 리우 패럴림픽 보치아 혼성 개인전 BC3등급 결승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뒤 스승인 권철현 코치에게 안겨 기뻐하고 있다. 한국 보치아는 정호원의 우승으로 패럴림픽 8회 연속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리우데자네이루=사진공동취재단

17일(한국 시간) 열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 보치아 혼성 개인전 BC3등급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정호원(30·속초시장애인체육회)을 키운 건 8할이 고난이었다. 장애와 가난, 그리고 지독한 불운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이날 경기에서 그리스의 그리고리오스 폴리크로니디스(35)를 8-1로 완파했다. 정호원 덕분에 한국 보치아는 8회 연속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건강하게 태어났던 정호원이 장애를 만난 것은 겨우 생후 100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부모가 생계로 운영하던 경기 가평군 대성리역의 한 매점 안 평상에서 떨어진 것. 정호원의 부모는 매점 인근에 사는 집을 갖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도 도둑이 들어 담배 등을 훔쳐가는 바람에 아예 아이를 데리고 매점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밖에서 취객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얘기를 들은 정호원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고, 남편을 걱정한 어머니 홍현주 씨(56)도 아이를 평상에 재우고 자리를 비운 사이 떨어진 것이다.

며칠 후부터 아이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 우유병을 꼭 잡은 두 손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 다시 쥐여 줄 때마다 우유병은 바닥에 뒹굴었다. 그제야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병원에서는 후천성 뇌병변(뇌성마비)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낙상의 충격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수교육시설인 충북 숭덕학교 초등부 2학년에 다닐 때 집에 불이 났다. 정호원은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마침 추석을 맞아 집에 왔을 때였다. 휠체어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아들을 어머니 홍 씨가 온몸으로 품어준 덕분에 정호원은 다행히 큰 화상을 입지 않았지만 대신 엄마와 네 살 위 형이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정호원에 이어 아내와 큰아들까지 장애인이 되자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남은 건 빚뿐이었다.

그러나 혼자 매점을 꾸려 가며 두 명의 장애인 아들을 키운 홍 씨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대통령도 사장님도 마찬가지다. 너희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어린 마음에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짜증을 내곤 했던 정호원은 숭덕학교 중등부 때 보치아를 접한 뒤 조금씩 달라졌다. 손도 발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홈통을 이용해 자신의 의지대로 공을 굴리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입문 2년 만에 최연소 국가대표가 될 만큼 소질을 보였지만 정호원은 고등부를 마칠 무렵 보치아를 포기하고 직업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인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견디다 못해 그의 스승인 권철현 코치(43)에게 ‘저 정말 죽고 싶어요’라고 문자까지 보내기도 했다.

2002년부터 정호원을 가르쳐 온 권 코치는 제자를 설득했다. 그리고 다시 국가대표가 된 정호원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권 코치와 함께한 14년 동안 각종 국제대회에서 27개의 메달을 땄다. 대부분 금메달이었지만 두 차례 패럴림픽과 네 차례의 장애인아시아경기 개인전에서는 우승하지 못했다.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 때문이었다.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 결승에서 다시 무너진 이후 정호원은 권 코치에게 울면서 “정말 독하게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개인전에서 무패 행진을 벌인 정호원은 결국 이번 리우 패럴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메달 땄어요” 13일(현지 시간) 남자 자유형 200m S4등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패럴림픽 역사상 최초로 수영 2관왕에 오른 조기성이 엄지를 세워 보이며 환호에 답하고 있다 ①. 16일 남자 탁구 대표팀의 최일상, 김정길, 김영건(왼쪽부터)은 단체전(TM4-5등급) 결승에서 대만을 2-1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②. 15일 여자 핸드사이클 로드레이스(H1∼H4등급)에서 은메달을 딴 이도연이 메달을 깨물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③. 여자 육상의 전민재는 13일 여자 200m(T36등급) 결선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2012 런던 패럴림픽(100m, 200m 은메달)에 이어 2개 대회 연속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④. 리우데자네이루=사진공동취재단

우승 뒤 정호원을 번쩍 들어 안은 권 코치는 “고맙다. 정말 잘했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정호원은 그런 스승에게 어눌하지만 “끝까지 믿어주고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알아듣기 힘든 정호원의 말을 통역해 주는 권 코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호원은 새벽부터 서울 청량리역의 한 매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어머니에게도 소감을 전했다.

“가… 강하게 키워 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권 코치의 통역 없이도 들을 수 있는 또렷한 발음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