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는 많은 책을 말할 때 오거서(五車書), 즉 ‘다섯 수레의 책’이라 하였다. 장자(莊子)가 친구 혜시(惠施)를 가리켜 “학설이 다방면에 걸쳐 있고 저서는 다섯 수레 분량”이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다섯 수레 분량 책은 많지 않다. 고대의 책은 세로로 긴 평평한 나무 조각들을 끈으로 엮은 죽간이나 목간 더미였으니, 오늘날의 단행본 한 권을 죽간으로 만들면 수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본격적인 장서가의 시대가 열렸다. 좌의정을 지낸 이경억(1620∼1673)이 1만여 권, ‘임원경제지’로 유명한 서유구(1764∼1845)가 8000여 권,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1766∼1838)가 3만여 권을 소장하였다. 이러한 장서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책도 많았다. 중국 명나라의 진계유(1558∼1639)가 보기에도 사신으로 온 조선 선비들의 탐서(探書)가 유별났던 모양이다.
예외적으로 많은 책을 소장해야만 장서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매년 공모하는 ‘모범장서가’의 양적 기준은 ‘일반도서 2000권 이상 소장’이다. ‘책 실은 수레를 끄는 마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들보에 닿는다’는 뜻의 한우충동(汗牛充棟). 당나라 문장가 유종원이 이 표현을 처음 썼을 때 맥락은 ‘신통치 않은 책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갈피 잡을 수 없이 방만한 1만 권보다 알차고 유익한 수백 권이 장서가의 기준에 더 부합할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