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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이 한줄]철도는 어떻게 세상을 바꿔 놓았는가

입력 | 2016-09-20 03:00:00


차가운 철이 어떻게 그리 뜨겁게 인간을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가까운 역으로 가보라.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박흥수·후마니타스·2015년)

할머니는 기차 안에서 과일을 팔았다. 새벽부터 조치원역 근처 도매상을 돌며 복숭아나 사과를 ‘고무 다라이’에 가득 채운 뒤 천안이나 대전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불법이었기에 할머니는 검표하기 위해 역무원이 열차 출입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몸을 의자 밑으로 숨겨야 했다. 승객들의 발밑에는 흙과 먼지가 가득했다. 때론 혀를 날름대며 도사리고 있던 뱀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역무원에게 걸리면 유치장에 갇혀 며칠을 공쳐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할머니는 기차를 볼 때마다 수십 년 얘기를 어제 일처럼 꺼내신다. 할머니에게 기차는 여전히 과일 무게가 목을 짓누르던 ‘고무 다라이’와 가슴 졸이며 숨어야 했던 역무원, 어둠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머물러 있는 공간이다.

반면 누군가에게 기차는 젊은 날의 풋사랑을 떠올리게 해준다. MT 가는 금요일 오후 청량리역에 모여 그와 함께 올라탄 대성리행 경춘선 기차, 맘에 둔 이의 옆자리를 몰래 차지하기 위해 폈던 눈치작전, 그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가득 담은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 한쪽을 건네기 위해 이리저리 애쓰다 그냥 기차에서 내려야 했던 아린 기억까지.

박흥수의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에는 기차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한 표준시의 탄생 과정부터 일본이 철도 강국으로 올라서게 된 계기, 많은 사람의 눈물이 담긴 경부선 부설까지 그가 20년 가까이 철도 기관사로 일하며 보고 들은 다양한 얘기와 역사적 사실들이다.

사방팔방으로 뚫린 도로에 밀려 요즘은 기차가 자동차에 많은 역할을 넘겨줬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은 기차에 얽힌 잊지 못할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다. 책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던 기차와의 추억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짠 내 가득하던 수인선 협궤열차나 후진해서 백두대간을 넘던 영동선 스위치백 구간처럼 이제는 사라진 것들을 다시 떠올리는 귀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