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만에 전역 무효판결 받은 정봉화 前소령 인터뷰
봉화 씨가 18일 기자와 만나 ‘윤필용 사건’에 대한 소회와 당시 받은 고문의 참혹함을 털어놓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65년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뒤 김포공항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윤필용 소장(좌)과 그의 전속부관이던 정봉화 씨.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정봉화 씨 제공
정봉화 씨(77)는 43년 전 전역지원서에 서명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18일 기자와 만난 그는 자신을 ‘윤필용 사건의 첫 번째 희생양’이라고 소개했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가장 먼저 보안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에 연행된 정 씨는 징역형은 면했지만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관절이 괴사해 평생을 지팡이 신세로 살아 왔다.
1973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소장의 비서실장(소령)으로 근무했던 정 씨는 그해 3월 11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날 정 씨는 윤 소장 생일 조찬에 참석하기 위해 윤 소장 자택을 찾았다. 대문 앞에 다가가자 작업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성 네 명이 정 씨를 둘러쌌다. “죽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라”며 정 씨를 지프에 강제로 태우고 간 곳은 보안부대 서빙고분실이었다.
정 씨는 “일개 소령이 뭘 알겠느냐”고 답변했지만 요원들은 10년 가까이 윤 소장을 보좌한 정 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 씨는 “당시 조사실에 이미 손영길 당시 수경사령부 참모장(준장), 김성배 당시 제3사관학교 생도대장(준장)의 이름이 적힌 서류가 있었다”며 “미리 짜놓은 듯한 순서대로 질문을 하고 고문을 하는 일상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정 씨는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웠지만 허위 자백으로 전우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요원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만족스러운 답이 없자 정 씨에게 전역지원서를 내밀었다. “서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형사재판을 받도록 하겠다”며 협박하고 고문했다. 정 씨는 처자식 생각으로 버텼지만 결국 사흘째 되던 날 서명했다. 퇴직금을 탈탈 털었지만 쌀 한 말밖에 살 수 없었다. 수년간 이어진 보안부대 요원들의 감시에 육사 동기들과도 연락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1975년 경북 포항으로 내려간 정 씨는 용접 기술을 배우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정 씨를 만나러 온 윤 소장과 1년 동안 함께 어울리며 바다낚시를 다니기도 했다. 윤 소장은 “고기가 왜 이리 잡히지 않느냐”며 역정만 부릴 뿐 사건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후 정 씨는 군인 정신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포항제철 외주 파트너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수필가로 등단하고 자서전을 발간하는 등 새 삶을 살았지만 정 씨는 늘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조국에 헌신하는 군인이 돼라’는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도 그의 개인 사무실에는 소령 시절 군복과 군 시절 받은 훈장들이 걸려 있다. 정 씨가 명예회복을 위해 이번 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정 씨의 변론을 맡은 박주범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40년 넘게 말 못 할 고통 속에 살아온 정 씨에게 이번 판결이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 윤필용 사건
1973년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게 하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모의 혐의를 받았던 사건. 이를 계기로 윤 사령관을 비롯한 군 간부 13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31명은 강제 예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