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들 ‘잃어버린 추석 특수’
20년째 견과류 가공유통업을 하고 있는 A 씨. 설 명절과 함께 1년 중 가장 대목인 추석이 지났지만 20일 A 씨의 사무실과 창고에는 여전히 선물세트 포장상자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평소 거래하던 대형마트에서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국내산 견과류 선물세트를 5만 원 아래로 납품하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선물 한도를 5만 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A 씨는 고민 끝에 납품을 중단했다. 연 매출의 60%가 넘는 명절 영업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지난 설까지만 해도 A 씨는 품질에 맞춰 선물세트의 구성과 가격을 정하고 해당 대형마트의 품평회를 거쳐 납품해왔다. A 씨는 “국내산 호두는 한 줌에 1만 원이 넘어가는데 어떻게 하느냐”면서 “다음 명절 땐 아몬드를 끼워 넣어 선물세트를 구성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수입 농산물을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전북 남원시 16만 m² 밭에서 재배한 참깨, 들깨를 조합원들과 함께 참기름, 들기름으로 가공해 판매해온 B 씨는 지난해 5만5000원에 내놓았던 추석 선물세트를 올해는 납품하지 못했다. 작년 추석 때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했던 7만 원짜리 선물세트는 이번 추석 때 매출 비중이 20%로 쪼그라들었다. B 씨는 “아예 선물을 안 받겠다고 돌려보내는 반송률도 두 배로 늘면서 발송을 의뢰한 기업에 환불을 해주고 택배비·반송비 부담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고 말했다.
추석이 지나고 백화점, 대형마트가 받아든 매출 성적표는 나쁘지 않았다. 이마트의 추석 선물세트 매출은 전년 추석보다 1.4% 늘었고, 롯데마트도 1.8% 증가했다. 주요 백화점도 10% 안팎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가 상품 판매 비중이 늘면서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상공인과 농가에 전가되고 있다. 유통업체들이 수수료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업체들에 가격을 낮춰 납품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마트 MD(상품기획자)는 “한정된 진열 공간에서 저가 선물세트 비중을 늘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싼 외국산 비중이 늘었다”며 “거래업체에도 고가보다는 중저가 선물세트를 납품하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에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은 한우업계다. 롯데마트 추석선물세트 판매 가운데 축산 부문 매출은 작년 추석보다 16.7% 급락했다. 내수 경기 침체와 한우값 상승, 김영란법을 앞두고 위축된 소비 심리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은 “대형마트들이 소비자들에게 ‘가격 거품을 뺐다’ 등의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소상공 업체들의 부담이 자리 잡고 있다”며 “마진을 ‘쥐어짜기’ 하는 현상이 이번 추석 때 심화됐다. 유통업체가 상생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