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의 꿈 키워가던 20대 청년… 새벽 화재에 탈출뒤 다시 건물로 집집마다 문 두드리며 “일어나세요”… 열흘간 사경 헤매다 끝내 하늘나라로
故 안치범씨
20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9호실. 흐느끼는 유족 뒤로 안치범 씨(28)의 영정 사진이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매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방화범이 지른 불길에 뛰어들어 잠든 이웃들을 깨우고 쓰러진 그는 유독가스에 질식돼 뇌사 상태로 열흘간 사경을 헤매다 이날 새벽 세상을 떴다. 안 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엄마에게 했던 말을 지키고 떠난 것만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9일 오전 4시경, 안 씨가 살고 있던 서울 마포구 서교동 5층짜리 빌라에서 갑자기 불이 났다. 동거녀의 이별 통보에 격분한 한 20대 남성이 저지른 방화였다. 3층에서 발생한 불길은 안 씨가 있던 4층까지 번졌다. 화재를 감지한 안 씨는 119에 최초 신고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곧 연기가 자욱한 건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잠들어 있는 이웃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이 모두 밖으로 대피했을 때 안 씨는 5층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유족은 안 씨가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안 씨가 뇌사 상태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 있을 땐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 선생님도 찾아왔다. 가을에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신청했던 안 씨에게서 연락이 안 오자 수소문을 했던 것이다. 안 씨를 지도했던 성우학원 선생님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빈소를 찾은 A성우학원 원장 양희문 씨는 “치범이는 평소 호탕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는 유쾌한 학생이었다”며 “나중에 학원 원장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말도 하곤 했었는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 씨의 아버지는 “이웃을 구하려다 죽음을 맞은 아들을 생각하면 기특하지만 남아있는 가족에겐 고통”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은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아들을 의사자로 신청할 계획이다.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