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한 권오영 서울대 교수
19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건물터(44호 유구) 앞에서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구덩이 폭이 1.5m에 불과해 조사원 한 명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땅을 겨우 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선은 철모를 눌러쓴 채 사진을 찍고 토기를 하나씩 수습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기들을 올려 보내고 다시 땅을 파내자 또 한 겹의 토기 무더기가 나왔다.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완형 토기들이 5층을 이뤄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19일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권오영은 “1999년 1차 발굴에 이은 2008년 재발굴에서 왕궁 우물(御井·어정)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풍납토성 안에 한성백제시대 왕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권오영 교수의 한신대 발굴팀이 2000년 경당지구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모습(맨위 사진). 2008년 재발굴에서 실체가 드러난 우물터(가운데)에서 총 200여 개에 이르는 백제시대 완형 토기들(맨 아래)이 출토됐다. 한신대 박물관 제공
남은 과제는 우물과 완형 토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우물을 폐기할 때 토기와 각종 희생물을 함께 넣고 제사를 드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시대 우물터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출토됐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도 폐기를 위한 제사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토기만 나올 뿐 동물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물 폐기 시점에 흔히 보이는 전염병이나 전란 등 천재지변의 흔적도 없었다.
권오영은 토기들의 개별 양식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우물이 축조된 4∼5세기 전라, 충청지역 토기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궁 내 자리 잡은 우물터의 정치적 상징성과 토기양식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백제 왕실과 지방민 사이의 복속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본사와 지방 말사들이 모여 합수(合水) 의식을 치른 것처럼, 각 지방 지배층이 토기에 특산물이나 물을 담아 경당지구 우물에서 회맹의식을 치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했지만 강력한 중앙통치가 이뤄지지 않아 학계는 한동안 이들이 반(半)자치 상태에 놓였다고 본다. 신라,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에서 막 복속시킨 지방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발견
그러나 토기 조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분명 글자가 있었다. ‘大夫(대부)’였다. 며칠 뒤 같은 유구에서 ‘井(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大夫’자 토기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였다. 해당 유구(101호)는 10마리의 말 뼈와 더불어 약 1200점에 달하는 제기용 토기가 깨진 채 쌓여 있는 제사용 폐기장으로 밝혀졌다. ‘大夫’에 대해서는 백제의 중앙관직명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1999년 시루봉 고구려 보루에서도 ‘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가 발견됐다. 권오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할 때 ‘大夫’와 ‘井’이 종교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됐다. 특히 경당지구에서는 왕실 우물과 더불어 국가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44호 유구)도 발견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경당지구는 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 왕성의 존재를 실증하는 핵심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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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