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레인지로버 부장판사’로 불리는 김수천 부장판사가 결국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됐다. 현직 부장판사가 법정의 가장 높은 단상 위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앉게 된 것이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게서 5만 원권 다발로 1억5000만 원이 담긴 쇼핑백까지 받았다고 한다.
현직 부장판사의 뇌물 수수 의혹은 정 전 대표 명의의 레인지로버 차량이 김 부장판사 측으로 넘어간 사실이 밝혀지며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제의 레인지로버 차량 인수대금 5000만 원 역시 정 전 대표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었다. 의혹이 불거진 지 석 달 넘게 검찰 수사만 지켜보던 법원의 태도가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김 부장판사는 휴직계를 냈고, 법원은 받아들였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까지 내놨다.
레인지로버 부장판사 사건과 스폰서 부장검사 사건이 주는 충격은 이전 법조 비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성역과 같은 재판과 수사라는 영역을 매개로 뇌물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비리 실태를 법조계나 공직자 비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언론인 역시 도마에 올랐다. 최근 조선일보 주필을 둘러싼 호화 접대 의혹이 기폭제가 됐다.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는 억울한 면이 많지만, 언론계 역시 감시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 됐다.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고 외쳐 봐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선 초록동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꼭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김영란법 시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들에 달리는 험악한 댓글들을 보면 이런 시선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한 수사기관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너무 고맙다”고 말한다. 김영란법을 근거로 공직자나 관계 기업 수사에 필요한 강제 수사 권한이 그만큼 늘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경찰-검찰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거론될 정도다. 공직자,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 등이 스스로 더 자정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다.
실적 올리기를 벼르고 있는 수사기관들 앞에서 잠재적 수사 대상으로 거론될지라도 감내해야 할 일이다. 공직이나 언론이나 모두 막중한 임무와 엄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회적 기대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다. ‘최후의 보루’라는 법원의 현직 부장판사가 재판 관여 청탁 대가로 억대 금품을 받고, ‘정의의 칼’을 자부하는 검찰의 현직 부장검사가 스폰서에게 휘둘리는 실태, 여기에 ‘감시의 눈’을 자부했던 신문사 주필까지 호화 접대를 받고 다닌 마당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사회의 높은 기대 수준을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