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열 사회부 기자
얼마 뒤 이 씨는 ‘우연히’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 앞을 지나다 J 검사에게 전화를 했고 차나 한잔하자며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 소재가 고갈됐다. 그러다 나이가 같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니 ‘족보’를 따졌다. 이 씨가 먼저 “D고교 출신”이라고 하자 J 검사가 깜짝 놀라며 “나도 D고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동기들 중에 ‘이민희’는 없었다. 반면 이 씨는 갑자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따져보니 이 씨는 D고 2년 후배였고 나이를 속인 게 들통나게 됐다.
이 씨가 “선배님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여 백배사죄한 뒤에야 J 검사의 화가 풀렸다. J 검사는 껄껄 웃으며 “똘똘한 D고 출신 하나가 대검에 있다”며 내선 전화를 중수부 검사실로 돌렸다. 이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홍만표 검사였다. J 검사, 홍 검사, 이 씨 순으로 1년씩 차이 나는 D고 선후배였다. 이때 피보다 진하다는 고교 선후배의 정을 확인한 홍 검사와 이 씨는 17년 뒤 연달아 구속됐다.
대우조선해양 사건에선 경남의 명문 K고교도 나왔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의 주요 혐의는 한성기업에 대한 특혜 대출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회사의 임우근 회장은 강 전 행장과 고교 시절 같은 반 친구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식처럼 등장하는 게 고교 동문이다. 학교 다닐 때 서로 알았든 몰랐든 사회에서 만나면 무장 해제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정서 때문일 것이다.
새로 취임하는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친박(친박근혜)계가 민다는 잠재적 대선주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충주고 동문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김 청장이 ‘경찰 2인자’ 자리에 앉은 배경을 놓고 뒷말들이 많다. 연말 연초면 일찌감치 대선 전초전이 시작된다. 각종 투서와 네거티브, 선거운동 관련 사건도 동시에 경찰과 검찰에 몰려들 것이다. 이땐 ‘고교 동문의 함정’에서 예외 케이스로 기록되길 바란다.
최우열 사회부 기자 dns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