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논설위원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서인의 대표 황윤길은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동인의 대표 김성일은 “그런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정반대 보고를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국가 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야 하는데 당시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서인 소속으로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가 된 율곡 이이는 1583년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먼저 준비해야 하는데 오늘날 나라의 정사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한심하여 가슴이 터질 듯하다”며 개혁안을 상소하지만 탄핵 대상으로 몰려 사직하고 만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의 국력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산업화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해 이제야말로 국운의 융성기가 왔다고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오만과 자만심이 번졌다.
한반도에 전쟁의 유령이 떠다니고 있고 북한은 ‘핵실험’ 단계에서 ‘핵무장’ 단계로까지 발전했지만 우린 안보불감증에 빠져 무력해져 있다. “미국이 있는데 감히 우리를 칠 수 있겠어?” “저러다 쿠데타 아니면 민란으로 무너지겠지” “북핵은 공격용이 아니라 협상용이야” 같은 담론들도 횡행한다.
1960, 70년대 우린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뤘다. 1980년대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시대도 열었다. 자부심이 한없이 고조되었다. 다들 국운의 융성기가 왔다고 했다. 삼성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차가 미쓰비시를 추월하며 올림픽에서 세계 10위권의 메달을 따는 걸 보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양 자기도취에 빠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만심이 번졌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경고도 무시했다. 가진 사람들은 펑펑 쓰고 노조 등 이익집단은 자신의 꿀단지를 지키기 위해 머리띠를 둘렀다. 이런 오만과 근거 없는 낙관주의 풍조가 안보에도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선놀음에 빠져 북핵 위기 앞에 갑론을박하며 정쟁을 일삼는 모습은 임란을 앞둔 조선의 조정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엔 동맹이나 공조도 무의미하다. 국방은 전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도 중요하다. 자주 국방 의지를 가져야 임진란과 같은 국난을 막을 수 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