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北核 파상 공세]클린턴정부, 1차 북핵위기때 강경론 YS “내가 강력 반대해 저지” 주장… 카터 특사 방북으로 대화 돌파구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은 1차 북핵 위기가 벌어졌던 1994년에도 심각하게 대두된 적이 있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영변 핵시설 단지에서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도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했다.
윌리엄 페리 당시 미 국방장관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은 재처리시설을 정밀 타격하는 ‘외과 수술적 선제공격’을 입안했다. 주한미군이 증원되고 부산항에 전시물자가 추가 도착하는 등 실제 전쟁준비에 돌입하는 움직임도 보였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자신의 강력한 반대로 선제타격을 저지시켜 전쟁을 막았다고 퇴임 이후에 주장했다. 하지만 페리 전 장관은 북한의 보복공격과 전면적 확대 가능성 때문에 “펜타곤 회의에서 공격 계획은 테이블 끝으로 밀려났다”고 밝혔다. 당시 사정을 아는 한국 외교관은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민간인을 일본 등으로 소개(疏開)하는 데 1주일 넘게 걸린다는 결론이 나오자 미국도 폭격을 감행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북폭보다 대북제재로 방향을 틀어 검토하는 사이 그해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과 ‘대북제재 유보와 재처리 중단’이라는 합의에 이어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꺼내면서 1차 북핵 위기는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