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연극인 이세상 씨
5월 광주의 슬픔을 담은 연극 ‘애꾸눈 광대’의 주인공 이세상 씨가 열연을 하고 있다. 이 씨는 “5·18의 슬픔을 슬픔으로만 묻어 둘 것이 아니라 희망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광주문화재단 제공
20일 오후 광주 남구 빛고을아트스페이스 5층 소공연장. 피에로 복장을 한 남자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짝이는 중절모에 한쪽 눈을 동그란 코와 같은 빨간 안대로 가린 그는 연극 ‘애꾸눈 광대’의 주인공 이세상(본명 이지현·65) 씨. “요새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웃을 수가 없어요. 먹고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제가 이번에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총을 하나 개발했습니다. 이름 하여 웃음 총!” 과장된 몸짓과 구성진 입담에 관객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잠시 후 무대가 어두워지고 애잔한 음악이 흘렀다. 환한 조명을 받은 애꾸눈 광대가 객석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혹시 이 사람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젊은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포스터를 목에 걸친 광대의 절규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일까.
‘애꾸눈 광대’는 5·18민주화운동 기념공연 상설화 사업으로 5·18 당시 현장에서 투쟁하다가 한쪽 눈을 잃은 주인공 이 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한국 현대사 비극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한바탕 신명나는 광대놀이로 풀어낸 작품이다. 2012년 초연 이후 5년째 꾸준히 무대에 올라 8월 23일 100회 공연을 맞았다. 이날 공연은 102회째로 올해 상설공연의 마지막 무대였다,
주인공 이 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폭력으로 한쪽 눈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전남도청에서 후배인 민철과 끝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하지만 도망가다 총에 맞아 실명한다. 민철이 계엄군 진압작전에 희생되자 부채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결혼 후 아이 이름을 민철로 짓고 제사도 지내 준다. 서울에서 내려온 여동생을 민철의 형 민남과 결혼시키지만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로 힘들어하던 여동생은 세상을 떠난다. 5·18 진상 규명 투쟁에 나서면서 가정을 돌보지 못한 탓에 아내와 아들 민철은 집을 나가 버린다. 자살을 시도하던 그는 꿈속에서 만난 민철과 여동생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국을 떠도는 광대가 돼 아들을 찾으러 다닌다.
이 씨는 2012년 5월 연극인 신동호 씨와 손을 잡고 1인극 ‘애꾸눈 광대’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직접 무대에 올라 오월 이야기를 절절하게 풀어냈다. 이후 작품은 2인극, 3인극으로 발전하면서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다. 연극은 올해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악기 연주 등이 어우러진 ‘악극’ 형식을 도입했다. 주인공 이 씨와 함께 그의 젊은 시절 역을 맡은 정이형 씨 등 전문 연극배우 5명이 합류하면서 극의 구성이 탄탄해졌다.
5·18을 주제로 한 다른 작품과 달리 ‘애꾸눈 광대’는 사건 당시의 참상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여생과 가족 해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아들을 찾는 것으로 표현되는 이 연극에서 진짜로 찾자고 말하고 싶은 건 나보다 서로를 먼저 위했던 ‘오월 공동체”라고 했다.
○ ‘5월 투사’에서 ‘애꾸눈 광대’로
1980년 5월 광주는 그의 삶을 180도 바꿔 놓았다. 광주상고를 졸업한 뒤 한때 악극단에 몸담았던 그는 1980년 서울에서 작은 슈퍼와 연탄배달업을 하고 있었다. 가끔 서울에서 모교의 야구경기가 열리면 응원단장으로 나설 정도로 끼가 있었다. 그러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가족이 걱정돼 광주를 찾았다. 현장에서 본 광주는 처참했다. 계엄군에게 목숨을 빼앗긴 주검들을 똑똑히 눈으로 봤다. “전남도청에서 주검들을 수습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다 농성동 바리케이드를 지나다 계엄군이 휘두른 M16 개머리판에 왼쪽 눈을 맞았어요. 전남대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실명했지요.”
5·18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맡아 1985년 5월 10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5·18의 숨겨진 실상을 알렸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 안대를 쓰고 나가 증언하기도 했다.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 왔다.
‘오월 투사’가 ‘광대’로 변신한 이유는 뭘까. “방방곡곡 대학과 중고교를 다니며 증언과 강연을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걸 꺼렸어요.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각설이 타령부터 색소폰 연주, 마술을 두루 배워 공연도 하면서 실상을 알리기로 했다. 연기와 노래, 악기 연주 등이 어우러진 그의 강연은 청중의 관심을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 씨는 1인극에 도전했다. 5·18민주화운동 30돌인 2010년 5월 처음으로 ‘5·18 품바’ 공연을 선보였다. ‘애꾸눈 광대’의 시작이자 연극인의 길로 들어선 계기였다.
연극 내용이 이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주위의 반대도 많았다. “무엇보다 가족의 반대가 심했어요. 좋은 일도 아닌데 이렇게 알릴 필요가 있느냐고 말렸지만 우리의 아픔이 광주의 아픔이니 널리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이 없도록 하자고 설득했어요.”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극작가와 영화배우, 마당극 총감독으로 또 다른 비상을 꿈꾸고 있다. 5월 마당극 ‘천강에 뜬 달’의 총감독을 맡아 10월 6∼8일 금남로 5·19민주광장에서 첫 공연을 한다.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를 다룬 악극의 대본도 쓰고 있다. 내년에 개봉할 예정인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애꾸눈 광대’는 저의 분신입니다. 작품 완성도를 높여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해 보고 싶어요.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정제된 연출의 힘으로 롱런하고 있는 영국의 연극 ‘쥐덫’처럼 말이죠.”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