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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가난했던 시절의 총파업

입력 | 2016-09-26 03:00:00


1921년 부산부두 총파업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수천 명의 인부가 운집해 노동하던 광경은 돌연히 자취를 감추고, 화로에 불이 꺼진 것처럼 부두에는 찬바람이 돈다. 배들은 짐을 부리지 못하여 발이 묶이고 되돌아간다.’

 1921년 부산항 풍경이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지금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 상선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화물 하역과 운반을 맡은 인부들의 파업으로 물류 대란이 일어났다.

 지금의 부산시장 격인 부산부윤 혼다(本田) 씨는 “동맹파업으로 이틀이나 화물이 적체되었으니 그 영향이 부산뿐 아니라 전국에 미쳤을 것”이라 걱정했다.(동아일보 1921년 9월 28일자)

 부산부두 총파업은 95년 전의 오늘, 9월 26일에 일어났다.

  ‘경찰이 총출동한 가운데 인부들은 해안과 부근 산지에 20∼30명씩 헤쳐모여 의론을 계속 중이다. 경찰은 노동자 30명을 잡아들였다. 또 선동자로 3명이 체포되었는데 선동죄와 출판법 위반죄로 조만간 나카무라(中村) 검사에게 압송되리라 한다.’

 노사 양측은 임금 문제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한 달 10∼15원의 품삯으로는 가족 부양은 고사하고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는 게 노동자 측의 침통한 주장’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노동자란 용어가 사용된 지도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이었다. 노동조합도 노동가요도 없던 때였다.

  ‘아무리 빈한한 생활을 한다 해도 아침 밥 저녁 죽 끓여 먹을 것은 벌어야 일을 계속할 터인데 요새처럼 벌이가 없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일당을 포기하고 파업을 선택한 것이라 했다.

 일감은 많아야 한 달에 15일을 넘지 못하고, 없을 때는 열흘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그해 초 품삯을 일제히 내린 여파도 컸다.

  ‘아무 단체도 없던 무식계급의 노동자들이 자기 생활이 근본적으로 파괴를 당하게 됨에 이같이 일제히 일어난 것’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임금 인상 요구는 약 30%였다. 각 운송회사 등 사용자 측은 경영 여건상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액수라며 반발했다. 경찰은 조직 없는 인부들이 별안간 일치된 행동을 취하게 된 데에는 배후가 있을 것이라 보고 선동 혐의를 받는 지식분자들을 취조했다.

 3일간의 화물 적체 끝에 일본인 운송회사들과 인부 측 대표자들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고 부산상업회의소의 중재하에 마침내 15% 인상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연행된 노동자들은 전원 풀려났고 배후조종 혐의자들도 석방되었다. 글자를 모르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선언서를 써준 것뿐이라는 탄원에 따라.

 그렇게 시작하여 한 세기에 걸쳐 이 땅에 뿌리내린 총파업과 노동운동은 일제하의 삼엄한 단속과 광복 후의 오랜 억압을 거쳐 이제 세계적 수준의 자유를 만끽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30년간의 노동조합 활성기를 거치며 파업은 어느덧 시위와 마찬가지로 위협도 공포도 잃어버릴 것도 없는 특권적 행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소규모 직장보다 산별노조의 우산을 쓴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종사자들이 최대 수혜자였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망의 직종인 은행원들이 금융산업 노조의 깃발 아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특급 파업 행사를 벌인 지난 주말에 이어 이번 주는 철도 및 지하철과 현대자동차의 종사자들이 줄줄이 그런 행사나 시위를 벌인다고 한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