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화하는 도핑
벤 존슨이 88 서울 올림픽 육상 남자 100m에서 1위로 들어오고 있다. 당시 그는 9초79로 세계기록을 세웠지만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약물인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동아일보DB
‘2012년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종목에 유전자를 조작해 단거리 달리기에 필요한 근섬유를 강화한 선수가 출전한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예선에서 적당히 뛴 이 선수는 준결선에서 8초94의 세계신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결선에서 너무 열심히 뛰다가 엄청나게 발달한 대퇴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슬개골 인대가 끊어지고 만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번개’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9초63의 기록으로 우승했을 뿐이다.
○ 진화하는 도핑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도핑 검사를 하고 있는 장면. 도핑을 적발하는 반(反)도핑 기술이 발전할수록 선수들이 도핑 사실을 숨기는 방법도 교묘해지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제공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결선은 가장 많이 얘기되는 도핑 사례다. 당시 캐나다의 벤 존슨은 9초79의 경이로운 세계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하지만 3일 뒤 약물 복용이 드러나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금메달은 2위였던 칼 루이스(미국)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1976년과 1984년 올림픽 남자 400m를 거푸 제패했던 에드윈 모지스는 “벤 존슨이 금메달을 박탈당한 것보다 그 선수만 도핑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고 말했다.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선수도 검사에 걸리지 않았을 뿐 도핑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말이다. 1989년 280명 이상의 옛 동독 선수가 도핑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도핑이 줄어들지 않자 IOC는 1999년 WADA를 설립했다.
반도핑 기술이 발달할수록 도핑 기술 역시 진화를 거듭해 왔다. 200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베이에어리어연구소(BALCO) 스캔들’이 대표적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BALCO는 메이저리그 최다 홈런 기록(762개)을 갖고 있는 배리 본즈와 육상 스타 매리언 존스 등에게 약물을 제공했다. 이들이 사용한 약물은 도핑 검사에서 적발되기 어렵게 ‘디자인’된 인공 스테로이드였다. 사이클 황제에서 ‘약쟁이’로 전락한 랜스 암스트롱은 자기 몸의 피를 뽑아 보관했다가 경기 직전 수혈하는 ‘금지 방법’으로 도핑 검사를 피했다.
○ 유전자-뇌 도핑의 시대
가장 유력한 유전자 조작 대상은 몸에 산소를 공급하는 적혈구의 수를 늘리는 에리트로포이에틴(EPO·적혈구생성촉진인자)이다. EPO는 스테로이드와 함께 현대 도핑의 대명사로 꼽힌다. 이 호르몬을 만드는 DNA를 몸속에 넣는 방법으로 유전자 치료를 하면 현재의 약물 도핑 검사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미 해외의 몇몇 연구소에서는 원숭이 등 동물 실험을 통해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유전자 변형을 통해 근력을 향상시킬 가능성도 있다.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한 연구소에서는 쥐의 유전자 하나를 변형시켜 다른 쥐보다 쳇바퀴를 더 빠른 속도로,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마라톤 쥐’를 만들어 냈다.
유전자 도핑은 아직 한 건도 적발되지 않았지만 WADA는 이미 유전자 도핑을 ‘금지목록 국제표준’에 포함시키고 이를 찾아내기 위한 실험법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준화까지 완성되고 나면 2018 평창 올림픽에서 처음 선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브레인 도핑’ 역시 새로 등장한 방식이다. 브레인 도핑은 뇌를 자극해 운동성과를 높이는 것이다. 사이클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브레인 도핑을 한 선수들이 좀더 빨리 페달을 밟는 것으로 나타났다. WADA는 아직 브레인 도핑을 금지목록에 넣어두고 있지 않다. 하지만 브레인 도핑이 선수들의 신체에 해를 줄 수 있고, 공정한 경쟁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언제든 금지될 수 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