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조선 중기 문신 조임도(1585∼1664)의 시다(간송집). ‘요((료,요))’는 막걸리다. ‘산료(山(료,요))’는 산촌, 산골의 막걸리다. 거칠고 험한 막걸리다. 거친 술에라도 취할 수 있다면 사람 사는 곳이 모두 무릉도원이라는 뜻이다.
막걸리는 이름이 많다. 탁한 술이라서 탁주(濁酒)다. 순조 즉위년(1800년) 9월, 경상감사 김이영과 안핵사 이서구가 인동부(경북 구미)에서 일어난 ‘장시경의 역모사건’을 보고한다. 내용 중에 ‘장시경이 (사람들을 모은 후) 막걸리(탁주)를 내어주면서 나누어 마시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조선왕조실록). 막걸리를 탁주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최립(1539∼1612)도 ‘예쁜 꽃이 집 모퉁이에 활짝 핀 때에/담 너머로 건네받는 탁주’라고 노래했다(간이집).
막걸리의 등급(?)은 어떻게 정했을까? 뚜렷한 기준은 없었으나 좋은 막걸리와 거친 막걸리는 분명히 나뉜다. 좋은 막걸리는 정성껏 빚은 후, 잘 걸러서 물을 타지 않은 것이다. 물 타지 않은 원액을 순료(醇(료,요))라 불렀다. ‘순(醇)’은 물을 타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다. 순료는, 진하고 짙은 술, 즉 농주(濃酒)였다.
성종 2년(1471년) 6월, 대사헌 한치형이 상소문을 올린다. 내용은 환관들을 조심하라는 것. 환관들은 영리하고 말솜씨가 유창하다. 입속의 혀 같다. 군주 가까이서 비위를 맞추며 아첨한다. 한치형은 “(환관에게 빠져들면) 순료를 마시면서 미처 취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상소한다. 환관의 감언이설을 경계하지 않으면 마치 진국 막걸리(순료)를 마신 것같이 취해서 여러 가지 일을 망친다는 뜻이다.
세종 15년(1433년) 10월, 조정에서 술의 폐해를 경계하는 내용을 반포한다. 내용 중에 중국 후위(後魏)의 모주꾼 하후사의 이야기가 있다. ‘하후사는 술을 좋아했다. 상을 당해서도 슬퍼하기는커녕 순료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하후사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죽었다.’(조선왕조실록)
고려시대 대학자 가정 이곡(1298∼1351)은 후한 말 오나라 주유의 인품을 두고,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오나라 장군 정보는 “주유와 사귀면 마치 순료를 마신 듯, 마침내 스스로 취한 줄을 모른다”고 했다(삼국지 오서 주유전).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1328∼1396)도 “맛있는 음식과 순료는 입에 매끄럽고 향기로우니/마치 보약처럼 술술 장에 들어간다”(목은시고)고 했다. 선조 때의 문장가 차천로(1556∼1615)는 약포 정탁(1526∼1605)에게 순료를 접대하고 시를 남겼다. ‘하룻밤 잘 묵힌 순료를 앙금도 거르지 않으니/석청처럼 달고 우유처럼 깔끔하다.’(오산집)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