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핀란드 헬싱키 시내 유서 깊은 켐프 호텔의 바에서 전직 컨설턴트인 조르마와 술 한잔을 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은퇴하여 헬싱키 근교의 호숫가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평온한 삶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저 1.0과 2.0의 틀로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라고 조언했다. 1.0은 현재의 상태이고, 2.0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상태이다. 2.0의 상태가 성취되고 나면 이는 다시 1.0이 되기 때문에 3.0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은퇴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은퇴 후 어떤 삶을 원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막하지만 은퇴 후의 삶을 무슨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까.
첫째, 직업(profession)이다. 사람들은 흔히 직장을 떠나 은퇴하면 직업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순이 넘어 은퇴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간이 짧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직장을 떠나서도 직장을 다닌 기간만큼 더 살아야 하는 요즘은 직장이라는 조직을 떠난 후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직장에서 나온 후 직업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둘째, 사람(people)이다. 은퇴하고 났을 때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떤 상황이 되기를 바라는가. 은퇴하고 시간이 나면 친구나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겠다는 생각은 현실에서는 자주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무리 친구, 가족이라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한쪽이 시간이 많이 남는다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까. 은퇴 후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는 것도 평소 연습이 있어야 가능하다. 내가 시간이 많다고 상대방이 나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셋째, 장소(place)이다. 내가 살던 곳에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은퇴 후 옮길 것인가. 대도시에 살 것인가 아니면 소도시에 살 것인가. 은퇴 후 살 곳 주변에는 무엇이 있기를 바라는가, 어떤 사람들과 가깝게 살고 싶은가.
네 번째 놀이(play)이다. 은퇴 후에는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많은 은퇴자들은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몰라 당황한다. 앞서 말했던 은퇴 후 직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심과 열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동차 업계에서 30년 이상을 보내며 100여 개국을 다니다가 은퇴한 전명헌 전 현대상사 대표는 블로그를 통해 자동차 산업에 대한 정보와 지혜를 나누었고, 요즘은 국내외 명산들을 다니며 사진 전시회까지 열 정도로 바쁘게 지낸다. 비교적 일찍 40대 중반에 은퇴한 정은상 씨는 일대일 코칭 학교인 맥아더스쿨을 열어 인생 이모작에 대한 도움을 주고, 테크놀로지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여 60대이지만 소셜미디어에 대한 강의를 할 정도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관심사를 뚜렷이 하여 놀이를 갖고 은퇴 후 새 삶을 살고 있다.
직장인은 은퇴가 두렵다.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만 갖고 어떤 준비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은퇴 후 원하는 삶을 올해가 가기 전에 뚜렷하게 한 번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나이가 몇 살이든.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조직커뮤니케이션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