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의 한 장면. 오른쪽이 주인공 히데오.
이승재 기자
히데오는 ‘루저’입니다. 소심하고 궁상맞고 돈 못 버는 보조 만화가인 그는 동거하는 여자친구로부터도 쫓겨납니다. 유일한 재산인 샷건 한 자루 들고 무작정 길을 가던 그는 떼로 몰려드는 좀비를 피해 도망만 다니다 자신도 모르게 총을 듭니다. 그러곤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안에 숨은 영웅의 기질과 운명을 스스로 끄집어냅니다.
그렇습니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너절한 태생과 능력을 나도 모르는 용기와 운명의 힘으로 거부하는 것이 영웅서사의 기본이니까요.
그런데, 본이 진짜 영웅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거대권력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는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지난한 승부를 선택합니다. “Who am I(나는 누구인가)?”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이 시작되는 질문이지요. 영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스스로에게 반복해 던지면서 번민했던 바로 그 질문. 나를 알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야말로 영웅의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반지의 제왕’ 속 난쟁이 프로도(일라이저 우드)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는 여타 영화들 속 영웅과 달리 ‘프레셔스’(귀중한 것)라 불리는 절대반지를 ‘얻기’ 위해 위태로운 여정을 자처하는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는 절대반지를 ‘버리기’ 위해 목숨을 걸지요. 절대반지를 손에서 내려놓으려는 그의 의지는 늘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는데, 이런 프로도의 아슬아슬하고 나약한 모습을 통해 “절대권력은 얻는 것보다 놓는 것이 100배 어렵다”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영화는 던집니다. 프로도는 못나고, 키도 작고, 겁도 많습니다. 끊임없이 유혹과 회의에 빠지는 그는, 그러나 한 걸음씩 전진합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나의 저주스러운 본성과 맞서 싸우는 존재야말로 영웅일 것입니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명으로 ‘로마의 휴일’ 각본을 써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얼굴 없는 작가 돌턴 트럼보의 실화를 담은 영화 ‘트럼보’를 보면서 ‘어쩌면 진짜 영웅은 이 아저씨처럼 늙고 찌들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죽을 때까지 일에 매몰돼 로봇처럼 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트럼보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힙니다. 청문회에 나간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현실과 타협한 동료들과 달리, 당당히 자존심을 지켰다가 실업자로 전락하지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가명으로 삼류 저질 영화들의 각본을 이틀 걸러 한 편씩 쏟아내고, 죽음 같은 피로를 이겨내기 위해 욕조에 들어앉아 하루 18시간씩 일주일에 7일 타자기를 두드려댑니다. 오로지 가족의 생존을 위해 각본을 쓰고 또 쓰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신경증과 소통 부족으로 가족과 멀어지면서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2004년 10월부터 연재한 ‘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은 오늘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뜨겁게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