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반인도 도핑 비상
‘고등학교 학생인데 스테로이드 8주 사용으로 5.5kg가량 근육량을 늘리려고 해요. 도움 주실 분 찾습니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헬스트레이닝 관련 카페에 최근 올라온 글이다. 선수가 아닌 일반 청소년이 근육질의 몸을 만들기 위해 약물을 써보겠다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글이 올라오기 무섭게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는 여러 개의 답글이 달렸다. 일부 답글에는 메신저 ID가 쓰여 있었다. 약물을 판매하는 ‘딜러’들의 ID다. 주로 전현직 보디빌딩 선수나 헬스 트레이너들이 많다.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신청하고 학생과 같은 문의를 하니 스테로이드 스택(stack·투여 매뉴얼)을 몇 가지 알려줬다.
‘처음이니 경구제+인젝션(주사 투입)+케어약 투여로 1스택을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변동원 순천향대서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의사들도 벌벌 떨면서 쓰는 약이 스테로이드”라며 “일반인들이 보약, 영양제 개념으로 비전문가들이 만든 음성적인 투약 방법을 따라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했다. 스테로이드는 기본적으로 간염, 간암을 유발하고 심근경색 위험을 증가시키며 고환 축소, 정자 생성 손상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스테로이드는 몸 밖에서 주입하는 외연성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이다. 외부에서 테스토스테론 물질이 들어오면 원래 체내의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억제되면서 여성호르몬 수치가 높아진다. 그러면서 여성형 유방 증세(여유증)도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케어약을 쓰도록 하게 하는데 이 물질은 체내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해 여성호르몬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인터넷 카페에서는 ‘놀바(놀바덱스)’로 통한다. 약물을 투여하겠다고 하면 가격을 제시한다. 가격을 물으니 ‘한 사이클(스택)에 100만 원 주시면 됩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이처럼 스테로이드 같은 금지 약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일반인들은 선수들처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의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에 약물 구입이나 사용에서 더 자유롭다.
○ 자기 과시 욕구가 약물의 위험성 희석
서울에서 헬스장 3곳을 운영하는 A 씨는 “간에 무리가 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약물의 도움을 받아 근육을 키우겠다는 손님이 많다”며 “직장에서 일을 하고 술자리도 많아 몸은 지치지만 약물을 하면 그 와중에도 운동량과 근육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쉽게 유혹에 빠진다”고 말했다.
요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정성껏 가꾼 몸매와 근육을 과시하는 일반인들의 사진이 경쟁하듯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금방 SNS 스타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이 올려놓는 게시물 조회수가 인기 연예인들보다 많을 때도 있다. A 씨는 “약물을 써서 몸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약물로 몸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딜러’들이 경쟁적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접근해 약을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B 씨(30)는 올해 5월 8주간 스테로이드 스택을 통해 건장한 근육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잘 만들어진 근육질 몸으로 호텔 수영장에서 꽤 시선을 끌었다. B 씨는 “8주 스택에 120만 원이 들었는데 근육이 생기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오른팔 팔꿈치 쪽에 괴사가 일어나는 부작용이 생겨 계속 약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에는 과식으로 살이 조금 찐 경우 근육을 유지하고 지방만 빼는 이른바 커팅제를 스택에 붙여 판매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A 씨는 “보통 약물은 태국 등에서 들여오는데 커팅제를 포함해 좋은 스테로이드 스택은 200만 원 정도”라며 “가격이 높아져도 수요가 더 늘고 있는 추세”라고 전했다.
스포츠에 입문한 일부 청소년이 정식 선수 등록을 하기 전에 약물을 사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종목 등록선수가 되기 전에 약물을 사용해 근육을 성인 수준으로 미리 성장시키는 것이다. 등록선수가 아닐 때는 KADA의 도핑 테스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예비 등록선수들의 약물 투여를 단속할 길이 없다.
김한겸 고려대 의대 병리과 교수(전 KADA 위원장)는 “선수 진입 단계에 있는 청소년들은 도핑 사각지대”라며 “체육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인데 지도자들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청소년 선수들은 도핑 교육이 가장 시급한 대상”이라고 말했다.
대학의 체육 관련 학과 입학 실기 전형에서 일반 학생들이 약물을 투여하고 실기 시험을 치르는 사례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대학 측이 비용 문제 등으로 체육 실기 시험 지원자들의 도핑 테스트를 하지 않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지난해 ‘체육 관련 학과 대학생의 입학 실기 전형 시 약물 사용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상명대 교육대학원 김인중 씨는 스테로이드 약물을 사용하고 실기 시험을 치른 뒤 대학 체육 관련 학과에 최종 합격한 학생 4명을 면담했다.
김 씨에 따르면 D대학에 합격한 H 씨(21)의 경우에는 부모가 체대입시학원 원장을 통해 30만 원에 스테로이드를 구매해 의사도 아닌 원장 지인이 놔주는 주사를 맞았다. H 씨는 면담에서 “스테로이드 효과가 있었다. 평소보다 실기 기록이 잘 나왔다”고 밝혔다. 김 씨는 “4명 모두 스포츠 스타들의 도핑 사례를 보고 약물 투여에 대한 확신을 가졌으며, 부모나 주변 사람들도 약물 부작용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며 약물에 대한 안전 불감증,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의 시각을 나타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