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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자유 평등 정의는 에너지를 따라 진화했다

입력 | 2016-10-01 03:00:00

◇가치관의 탄생/이언 모리스 지음/이재경 옮김/478쪽·2만2000원·반니




저자는 농경이 계층화로 인해 수렵채집 경제보다 폭력성이 완화되고 사회적 불평등을 감수하는 가치관을 낳는다고 본다. 추수하는 사람들을 그린 이집트 벽화. 동아일보DB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역사학자는 대담하거나 무모한 사람일 것이다. 저자의 논지는 에두르지 않고 간결하며 단호하다. 1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인류의 모든 가치관이 에너지 획득 방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현상의 경향을 기술하는 데 그치는 여느 역사학자들과는 다르다.

 논지 전개 방식도 독특하다. 이 책을 몇 초간 스윽 넘겨본 독자는 “이거 역사책 맞아?”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실질임금과 지니계수, 국내총생산(GDP) 비중, 씨앗 및 포유류의 생장이 활발한 지역 등 온갖 통계와 도표가 책 곳곳을 빼곡히 채운다. 고고학에서 시작해 진화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편력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데이터의 홍수가 지향하는 서사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류의 발전단계를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산업혁명) 시대로 삼분하고 각 단계의 변화를 이끈 동인(動因)을 분석한다. 저자는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소비하는 에너지양이 많아지면 인구가 늘면서 계층화가 심화된다고 본다. 계층화된 사회구조는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핵심 가치관을 좌우한다는 주장이다. 계층화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측면도 있지만, 인간 본연의 폭력성을 억제한다는 것도 중요한 논점이다. 선사시대로 올라갈수록 유골에 남겨진 폭력성이 심해진다는 고고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재밌는 것은 3단계의 역사 진행 과정에서 기후 변화와 지리적 혜택과 같은 우연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데 오랜 빙하기가 끝난 뒤 찾아온 ‘긴 여름’(1만2000년 전부터 찾아온 세계적 간빙기 현상)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식용 가능한 동식물이 왕성하게 번식한 ‘행운의 위도(緯度)권’인 고대 중동, 인도, 중국에선 농경을 기반으로 한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다. 농경에 따른 가축 활용과 사회 규모 확대에 힘입어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하루 최대 3만 Cal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고대 로마나 중국 한나라, 인도 마우리아 왕조와 같은 소수의 거대제국들이 다다른 에너지 소비 수준이다.

 농경에서 화석연료 경제로 넘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우연성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다. 예를 들어 광대한 태평양을 끼고 있는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의 대서양을 둔 유럽은 바다로 나가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유럽은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광대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탈할 수 있었다. 월등한 부의 축적은 화석연료를 활용한 기계문명을 여는 데 중요한 물질적 기반이 됐다. 실제로 대서양 일대 에너지원을 독식한 유럽의 에너지 획득량은 17세기에만 10%나 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구조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낳는다. 예컨대 화석연료 경제는 케인스가 언급한 유효수요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구매력이 있는 중산층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유인도 필요하므로 부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감수하는 가치관을 조장한다는 얘기다.

 이 모든 설명이 맞다면 형이상학자들은 깊은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연성이 크게 작용한 사회구조와 문화가 가치관을 결정한다면 시대를 초월한 가치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내 이론은 절대 도덕률을 산정하려는 노력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비판한다”고 썼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