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작가 이언 매큐언의 ‘호두 껍데기’
신작 소설의 화자는 놀랍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 속의 태아이다. 약 8개월에 접어든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자신이 듣고(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아직 볼 수는 없지만) 느끼는 정보를 종합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추리하는 영민한 모습을 뽐낸다.
그는 어머니가 자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팟캐스트를 통해 타국의 정치인을 평가하고 주정뱅이 어머니가 종종 마시는 와인을 탯줄을 통해 맛보며 ‘한 잔 더 할 거라면 상세르(포도 품종)보다는 샤토 엘시노어가 낫겠어’라고 중얼거린다.
이쯤 되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줄거리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어머니인 트루디(흔히 ‘거트루드’라는 이름의 약칭으로 쓰인다. 햄릿의 어머니 이름이다)와 삼촌 클로드(햄릿의 삼촌은 클로디어스)가 공모해 아버지에게 독이 든 스무디(‘햄릿’에 나온 독주)를 건네고, 삼촌과 어머니는 저택을 차지한다.
혹시나 이를 눈치 채지 못했을 독자를 배려해 매큐언은 ‘햄릿’의 한 구절로 소설을 시작한다. ‘오, 하느님. 나는 우주의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도 스스로 무한한 우주의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자궁(호두 껍데기)에 갇힌 태아가 햄릿이라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이 책에서는 ‘태어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태아의 운명은, 그리고 그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매큐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이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