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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가게 들어오니 단골 쑥쑥… “썰렁하던 시장골목 북적”

입력 | 2016-10-06 03:00:00

[내고장 전통시장]<3>서울 강동구 명일시장




 

서울 강동구 양재대로 명일전통시장은 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으나 최근 주변에 대형마트가 생기며 위기를 겪었다. 강동구청과 명일전통시장상인회는 30대 청년들을 위한 창업공간 ‘청춘마켓’(오른쪽 녹색 점포)을 신설하며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1.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던 프로그래머 김동준 씨(33)는 어느 날 오른쪽 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망막 표면에 투명한 또 다른 막이 증식해 시야를 방해하는 망막전막증이었다. 10년 내 백내장으로 변해 시력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더 이상 종일 모니터를 응시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인생 2막을 열 방법을 찾아야 했다.

 #2. 서울지하철 5호선 명일역 인근 명일전통시장에서 ‘식자재왕도매’를 운영하는 윤여종 명일시장상인회장(56)은 지난해부터 고민이 많았다. 하나둘 늘어가던 시장 주변 대형마트가 어느새 6곳이나 생긴 것. 게다가 시장에서 차로 불과 20분 거리에는 국내 최대 쇼핑몰 개점이 임박했다는 뉴스가 연일 들려왔다. 지역 아파트 주민들이 가까운 시장 대신 먼 쇼핑몰로 몰릴 것이 뻔했다. 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강동구청과 명일전통시장상인회는 올 3월 명일시장에 창업할 청년창업자를 모집한다는 온라인 공고를 냈다. 조건은 33세 미만. 기존 시장 상인과 겹치지 않는 품목일 것.

 위기의 시장을 살리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총 12팀이 지원해 최종 5팀이 뽑혔다. 볶음우동(야키소바)을 파는 ‘청춘도장’, 돈가스 전문점 ‘수아영’, 리코타치즈샐러드와 주먹밥을 파는 ‘더 손맛’, 마카롱 아이스크림 와플점 ‘와플’, 수제 장신구와 저고리 전문 ‘꽃빔 혜안’. 모두 30대 초반 청년들이 문 연 가게들이다. ○ 젊은 피 수혈 뒤 슬럼가 사라져

 지난달 22일 오후에 찾아간 명일시장은 상인과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청춘마켓 1∼5호점이 나란히 들어선 녹색간판의 점포에는 ‘수아영’에서 돈가스를 준비하는 김 씨도 있었다.

 돈가스 요리사로 전직하며 ‘인생 2막’을 시작한 김 씨에게 명일시장은 첫 둥지다. 김 씨는 “처음에는 적응도 못 하고, 주변 상인분들도 훨씬 어르신들이라 대하기가 어려웠다”며 “보름은 점심도 못 먹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맞은편 가게 어르신께서 평상에 밥을 차리시더니 ‘와서 같이 먹자’고 불러주셔서 그때부터 친해졌다”며 “지금은 다들 몇 개 팔았느냐, 장사 잘되느냐고 안부를 물으신다”고 말했다. 가게 이름인 ‘수아영’은 딸 수아와 아영이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주변 상인들도 청춘마켓의 입점이 명일시장에 활력소가 됐고, 손님도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명일시장 최고령 상인 심정심 씨(84)는 시장 동쪽 입구에서 채소가게를 한다. 시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봐 온 심 씨는 “젊은 사람들이 최근에 많이 들어와 보기도 좋고 시장 분위기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심 씨는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고령인 지금도 매일 직접 가락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어 온다고 말했다.

 청춘마켓 도입을 위해 강동구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윤 씨는 “청춘마켓 자리가 원래 국가도로라 점용 허가가 필요한 자리였다”며 “구청 승인도 필요했고, 구청 내에서도 부서마다 이견이 있어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 씨의 뜻에 공감한 구청 직원들이 광주, 전주 시장을 발로 뛰며 관찰하고, 다른 청년시장도 답사한 뒤 함께 추진해 지금의 청춘마켓이 결실을 거뒀다. 윤 씨는 “청춘마켓이 들어선 골목은 원래 인적이 드물어 슬럼화된 지역이었는데 밝은 느낌의 청춘마켓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 외부 상인에게 점포 내주며 ‘공생’… 다양성 커져


 명일시장은 외부 상인에게 시장 공간을 내주는 ‘열정마켓’ 실험도 하고 있다. 자칫 기존 상인들과 이해관계가 부딪쳐 갈등이 생길 소지도 있지만, 오히려 명일시장 상인들은 외부 상인을 보듬고 도와주고 있다.

 공윤택 씨(40)와 탁영웅 씨(32)는 서울 송파구 가든파이브에 사무실을 두고 캘리그래피(손 글씨) 액자를 제작해 판다. 브랜드 이름은 ‘누크하우스’. 이들은 지난달 21일 명일시장 열정마켓에도 판매 공간을 열었다.

 탁 씨는 “전통시장에서 취급하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진열한 물건들을 기존 상인들께서 보러 오시고 신기하다며 감탄하셨다”고 말했다. 탁 씨가 판매대를 설치하기 위해 분주했을 때 시장 상인들은 탁 씨에게 패널을 공짜로 주고, 점포 앞을 내주며 페인트칠, 톱질을 다 하게 했다. 탁 씨는 “요즘 인심이 자기 가게 앞에서 누가 다른 일 하면 쫓아내거나 싫은 소리 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너무 친절해서 신기했다”며 “제가 공구나 자재를 들고 시장골목 뛰어다니는 모습이 재밌으셨는지 보고 웃으셨다”고 말했다. 공 씨와 탁 씨는 이달 23일까지 명일시장에서 한시적으로 액자를 팔 계획이라고 말했다.

 명일시장은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으로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상인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강의를 하는 ‘상인대학’도 열고, ‘명일시장 가는 날’, ‘5000원의 행복 도시락’ 등 이색 사업도 하고 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