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들의 수다’에 초대에 응한 이승철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하반기 공연을 앞두고 가족과 제주도에서 장기 휴가를 즐긴 ‘흔적’이었다. 그의 검은 피부는 이승철을 더욱 ‘에너지 넘치는 남자’로 보이게 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이승철의 삶과 노래
내 곁을 오래 지켜준 30년 올드팬은 자부심
공연실황 온라인 무료 공개는 팬을 위한 것
70대 로드 스튜어트의 섹시한 콘서트처럼
‘팬들과 함께’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
하나의 직업으로 30년을 살아가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 그리고 ‘환희’가 뒤섞인 과정일 것이다. 가수 이승철(50)은 “타고난 기질” 그리고 “운” 덕분에 그 시간을 지나왔다고 했다.
연말까지 일정표를 꽉 채운 이승철을 ‘여기자들의 수다’에 초대했다. “하반기 공연 전 가족과 제주도에서 장기 휴가를 보냈다”는 그의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가수로 30년을 살았다. 긴 시간이고, 여러 일도 있었다.
“전부 ‘추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하! 워낙 일이 많았으니까. 밴드 부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공연 포스터를 붙이다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고, ‘희야’라는 곡이 뜨고 나서 여의도 63빌딩에서 처음으로 3000명 모아 공연도 했다.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객석을 과연 채울 수 있을까 싶었지만,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펼친 첫 번째 솔로 공연도 잊을 수 없다. 그 사이 결혼을 했고.”
-관두고 싶은 때는 없었나.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노래하고 싶어도 못할 때는 있었지만 ‘음악을 관둬야지’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도, 운명적으로, ‘딴따라’로 태어나서인 것 같다. (연예인)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슬럼프? 있었다. 그걸 이기고, 넘어갈 수 있던 힘은 ‘운’ 덕분이다. 30년이나 일했는데, 지금 50살 밖에 안됐다. 아, 얼마나 행운이냐.”
이승철을 만난 날 마침 한 포털사이트를 통해 그의 공연 실황이 공개됐다. DVD에 담길 공연 실황을 온라인으로, 그것도 무료로 먼저 공개한 ‘배포’가 궁금했다.
“오직 팬들을 위한 서비스로 제작했다. 팬들이 하나쯤 소장하도록 하고 싶었다. 우리 팬들은 DVD나 CD는 잘 산다(웃음). DVD 제작비? 밝히기에는 좀…. 2억원 조금 더 들었다. 대충 만드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와이프도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멋있게 만들라고 한다.”
-팬서비스 정신이 남다르다. 아이돌 스타도 이렇게는 못하는데.
“돈 벌자는 차원이 아니다. 정말 팬들을 위한 것이다. 사실 내 또래 가수들은 요즘 조금씩 위축되지 않았나. 활동 범위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래도 그러고만 있을 순 없다. 내가 할 수 있다면, 선배 가수로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당신처럼 30년 동안 꾸준히 히트곡을 낸 가수를 찾기 어렵다. 운인가, 실력인가.
“그야 당연히 운이지. (솔직한 마음을 말해보라며 재차 묻자)그렇다고 실력이라고 말하면 너무 ‘싸가지’ 없잖아.(웃음) 야구선수로 치면 선구안이지 않을까. ‘소리쳐’ 같은 곡은 수많은 가수들을 거쳐 나에게 왔다. 심지어 노사연 누나한테도 갔다가 나한테 왔으니까. 통기타 반주로 녹음된 ‘소리쳐’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아주 새롭다고 느꼈다. 그래서 불렀다. 주위 동생들은 ‘이승철 형이 미쳤나’ 싶었을 거다. 그만큼 도전이었으니까.”
-팬들은 당신이 가장 섹시할 때가 ‘무대 위에서’라고 말한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로드 스튜어트의 콘서트를 본 적이 있다. 와…. 정말 섹시했다. 70대에 그렇게 섹시하기는 쉽지 않지. 아주머니 팬들이 눈물 흘리면서 좋아하는데, 거의 죽기 직전이더라. 하하!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가수와 팬은 자연스럽게 시대와 함께 가는 것 같다. 내가 10대 팬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순간 망하는 거다. 내 곁을 오래 지켜준 올드팬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난 우리 팬이 자랑스럽다. 조금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30년간 나를 버티게 해준 힘도 바로 그들이다.”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팬덤을 유지한 노하우가 궁금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수는 노래로, 배우는 연기로 말하면 된다. 한참 힘든 시기에 (코미디언)엄용수 형이 해준 말이다. ‘노래로 보여주라’. 그 말을 듣고 노래 ‘오직 너뿐인 나를’을 냈다. 팬덤? 인기? 내 실력과는 상관없는 것 같다.”
“과거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 소속사 사장이 찾아와서 ‘이제 그만하자’고 하더라. 그 상황이 이해됐지만 참 씁쓸했다. 그때 내린 결심이다. 내가 음반 만들어 팔고, 홍보도 직접 했다. 한 손엔 LP 들고, 한 손엔 박카스를 들고 방송국 찾아다녔다. 서울 여의도 MBC 라디오국에 매일 출근한 적도 있다. 연예인이랑 매니저가 싸우는 걸 보면, 속으론 매니저 편든다. 하하!”
가수 이승철.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마라도·울릉도·태백 등 문화소외지역으로
직접 찾아 무대 선보이는 일이 새로운 목표
결혼은 내 인생에 불씨를 다시 지핀 계기
신승훈에게도 빨리 장가 가라고 잔소리 해
-매년 전국투어 공연을 하려면 체력 관리가 관건일 텐데.
“1년에 6개월 공연하고, 나머지는 쉰다. 쉴 때는 뭐 마음껏 먹고, 놀지. 하다못해 식사 때마다 반주도 한다. 그러면 4∼5kg 금방 찐다. 공연하기 몇 주 전부터 체중 관리 확실히 해서 싹 빼고.”
이승철이 8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30주년 기념 공연의 제목은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이다. “공연을 자주 보지 못하는 관객과 함께 하자”는 뜻으로 지었다. 그리고 30주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목표를 하나 더 세웠다. 마라도, 울릉도, 강원도 태백과 영월처럼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은 문화소외 지역을 직접 찾아 무대를 선보이는 일이다. “기타 하나만 들고 하는 남극 장보고기지 공연도 추진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확실히 결혼하고 나서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아내의 내조 덕분일까.
“결혼하면서 내 인생에 불씨를 다시 지폈지. 나를 움직인다고 할까. 가수는 선천적으로 게으르다. 어떤 일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조금씩 늦다는 뜻이다. 아내는 나와 정반대이다.”
-가족으로부터 얻는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어려울 때 가족 밖에 없다. (신)승훈이에게 빨리 장가 가라고 잔소리하는 이유도 내 경험에서 비롯된 거다. 소위 결혼하면 음악적인 ‘필’이 끊긴다고 하는데, 절대! 요즘 내 히트곡은 다 결혼하고 나왔다. 하하!”
-두 딸에게 몇 점짜리 아빠일까.
“자신 있다. 당연히 100점이지. 나는 헌신적이다. 아홉살인 막내딸의 유치원 재롱잔치부터 학교 입학식, 학예회까지 모든 행사에 따라다녔다. 아빠들의 가치관이 각각 다르지만, 나는 젊은 아빠이고 싶다. 소파에 누워있는 아빠가 아니라 잘 놀아주는 아빠. 딸이 날 닮아서 활동적이다. 노래도 끝내주게 잘 한다.”
-제작자로서 딸의 재능을 발견한 건가.
“음…. 우리 부부는 딸이 가수가 되길 바라지 않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시켜야지. 대신 아주 체계적으로. 하하!”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를 세우고, 탈북 청소년 합창단 지휘도 했다. 최근 여러 사회활동에 적극적이다.
“음악의 힘을 믿는다. 가장 희열을 느낀 때는 소년교도소 재소자들과 합창단을 꾸린 일이다. 가족을 초대해 공연을 했다. 재소자 소년들이 그 공연에서 처음으로 가족과 손을 맞잡았다. 그때 합창단 활동하다 출소한 한 친구는 바리스타가 됐고, 또 다른 친구는 차량정비소에서 착실하게 일한다.”
인터뷰 말미 이승철은 “1만 시간의 법칙”을 꺼냈다. 어떤 일에 ‘미쳐’ 1만 시간을 투자해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그만의 가치관이다.
“나도 이제야 음악이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나에게도 통했다.”
● 이승철
▲1966년 12월5일생 ▲불광초, 서대문중, 대신고 ▲1985년 록밴드 부활 보컬로 데뷔 ▲1989년 솔로로 전향, 현재까지 2000회 넘는 공연 횟수 기록 ▲‘희야’ ‘마지막 콘서트’ ‘비와 당신의 이야기’ ‘소녀시대’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네버엔딩 스토리’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등 히트 ▲1992년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영화 데뷔 ▲2007년 아내(박현정)와 결혼, 슬하에 2녀
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