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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고정일]아름다운 말 ‘한글’

입력 | 2016-10-08 03:00:00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벌써 배어 가지고 나온 그 아름다운 말… 영주(英主) 세종께서 만드사 널리 서민에게까지 펴주신 ‘가나다라’의 그 갸륵한 문자.”(김동환의 시 ‘잃은 것 얻은 것’)

 한글은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멸시당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글이라 탄압받았다. 1911년 조선광문회 주시경, 최남선, 현채, 김두봉이 최초로 한글사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일제 탄압 속에 중단되고 만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29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이극로에게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 문화운동 계몽운동이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외신들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토착어를 지키려 한글을 사용키로 한 뉴스를 전했다. 유네스코는 이례적으로 한글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국어는 그리스어와 함께 우수한 알파벳 표기체제를 갖춘 매우 경제적 민주적인 문자이다.” 그리스 아테네대 요르고스 바비니오티스 총장은 감탄했다. 1963년 미국 학자들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조어 방식을 그림으로 추상화한 문자인 ‘보이는 음성’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학자들은 한글이 ‘보이는 음성’에서 제시한 착상보다 400년 앞섰다고 경탄했다. 펄벅도 한글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단순글자이며 자음 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언어와 음성이라도 표기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인은 79%만 글자를 읽고 쓴다. 우리 문맹률은 0%에 가깝다. 쉽고 간결한 한글 덕분이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인 이유는, 역동적 국민성과 함께 발음 그대로 표기하며 자음 모음을 환상적으로 조합해 빠르게 언어를 정보화할 수 있는 한글 덕분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국어 실력이 빈약해 보고서조차 제대로 못 쓰는 사회인들과 대학생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영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시달리는 학생들. 우리는 먼저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한민족 자유이고 사상이며 정신임을 잊은 게 아닐까.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 주시경 선생은 가르쳤다.

 훈민정음 반포 570년, 한글날 90년, 광복 71년을 맞는 오늘날 왜 우리는 국어를 홀대하는가. 어린시절 읽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떠오른다. “그날, 교실에는 대장간집 아저씨, 물방앗간집 아주머니, 푸줏간집 영감을 비롯해 마을 어른들이 뒤쪽에 서 있었다. ‘오늘이 우리 국어의 마지막 수업 시간입니다. … 프랑스 만세!’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에 학생 학부모 모두들 눈물을 글썽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자기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에서 매일 책을 읽는 인구는 전체의 8.4%뿐이라고 한다. OECD 평균 20.2%와 비교할 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문제는 이 숫자가 그대로 과학기술과 문화와 국력 차이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신문과 책을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광복 이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그 주변에 서점도 많이 들어섰다. 그러나 4·19를 고비로 서점이 하나둘 줄어들다가 EBS 교재 수능연계 출제율 75% 때부터 서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서점 없는 대학가’라는 현상에 맞닥뜨린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샘’을 개통한다며 우리 사회의 소통과 문화 콘텐츠 생산 보물창고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함부로 만들어내는 ‘힐링하다’ ‘그루밍’ 등 인터넷의 경박한 유행 조어들이 제발 한글의 아름다움을 훼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