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는 소리와 색을 매개로 자연과 호흡하며 산다. 집에서 바라보면 과수원을 품고 있는 운남산이 보인다. 이 산은 비록 안동 병산서원 앞산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늘 당당하다. 특히 안개가 끼거나 비나 눈이 내리면 운치가 그만이다. 이른 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산빛은 하루하루 달라지는데 자두꽃이 필 때가 가장 예쁘다. 이때면 논에는 모가 심어지고 포도 넝쿨, 사과나무에도 하나둘 잎이 돋아나고 곧이어 개구리와 소쩍새가 다투듯 울기 시작한다.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 숲도 벼도 한층 푸르러진다. 김천의 명물 자두가 붉은빛을 띠기 시작하면 곧 매미가 울면서 더위는 절정으로 달린다. 포도는 검은색으로, 복숭아와 사과는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배가 굵어지면 어느덧 들판 색이 바래기 시작하는데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오면 자연의 향연이 막을 올린다.
이 향연에 동참하는 다른 방법은 시장 구경이다. 김천은 강경, 평양 등과 함께 조선 5대 장(場)의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도시 전체가 시장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만큼 시장이 많다. 황금시장을 필두로 중앙시장, 감호시장, 평화시장까지 모두 4개의 시장이 있다. 신시가지인 신음동에서도 제법 규모 있는 오일장이 열린다. 농산물 경매장도 두 군데 있는데 자두로 시즌을 시작하여 참외, 포도, 복숭아, 사과를 거쳐 호두와 감으로 마감한다. 김천으로 옮겨왔을 때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고속도로 2개와 철도 3개, 국도 2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지만 이제 5대 장의 영화는 옛 노래다.
지금 김천에서는 땅콩, 포도, 사과가 공장에서 만든 과자보다 싼 시기다. 시장에서 풍성한 가을 선물을 보는 것은 지방살이의 소소한 재미다.
― 박한규
※필자(54)는 서울에서 공무원, 외국 회사 임원으로 일하다 경북 김천으로 가 대한법률구조공단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