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이 무서워 천년고도 경주를 절해고도 경주로 만들 순 없다 여진이 두렵지 않은 이 없고, 누구도 땅 밑은 알 수 없지만 지진에 속절없이 무릎 꿇기보다 경주를 찾아가서 놀아주는 게 지진을 이기는 최선책이 아닐까
심규선 대기자
기운 듯 안 기운 듯 첨성대 주위에는/고사리손 잡고 온 동네 어린이집 아이들뿐/천년 위에 역사를 얹던 귀객들은 어드메뇨.
황남동 옛마을서 지진의 손톱을 본다/전통기와 뜯어내고 함석기와 늘리는 게/슬며시 아쉬운 건 외지인인 나뿐인가.
경주에 다녀왔다. 옛 기와집들이 많이 피해를 본 황남동을 제외하고는 지진의 상흔을 금방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설명을 들어야만 눈에 들어왔다. 지진의 가장 큰 피해는 주택이나 건물, 문화재가 아니라 경주 시민들의 놀란 가슴이었던 것 같다. 모든 국민이 마찬가지였지만.
그런데 경주와 경주 밖의 ‘놀란 가슴’이 이별하고 있다. 경주 시민들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외지인들은 점점 경주를 멀리하고 있으니. 경주에서는 요즘 “지 눈을 지가 찔렀다”는 말을 한다. 경주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탐대실이었다는 것이다(물론 지지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홍수나 태풍이 금방 다시 오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재난지역 선포는 사후지원책이다. 하지만 경주 지진은 여진 때문에 재난지역 선포를 사전경고로 받아들이는 부작용이 생겼다. 보험회사도 경주지역 여행자보험은 안 받아 준다. 숙박업소의 9월 취소율도 80%가 넘었다. 단체관광과 수학여행 등에 의존하는 경주에는 큰 타격이다. 경주시는 사적지와 주차장 무료, 숙박시설 할인 등의 긴급 대책을 내놓고, ‘경주 지진’ 대신 ‘9·12 지진’이라고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재작년 세월호, 작년 메르스에 이어 더 큰 악재를 만난 셈이다.
경주시는 매스컴에 지진 피해나 공포를 과장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동의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가 제정에 관여한 재난보도준칙 전문(前文)에 “언론의 재난보도에는 방재와 복구 기능도 있음을 유념해 피해의 확산을 방지하고 피해자와 피해지역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고 명기한 것도 바로 이런 경우를 상정해서다.
문화재 복구 과정에서 속도를 우선해서도 안 된다. 문화재청이나 상급기관에서는 ‘시트를 쳐놓은 모습이 보기 흉하다’며 빨리빨리 복구하라고 경주시를 채근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자체가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에 손을 댈 수 있는 법적 근거나 재량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나중에 책임지지 않을 일을 강요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차제에 지자체가 응급조치 정도는 해서 훼손이 심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도록 권한 일부를 시도에 위임하는 방안도 검토해 봄 직하다. 국민들도 여유를 갖고 기다려주는 게 좋겠다. 4월에 강진 피해를 입은 일본 구마모토 현은 현의 상징인 구마모토성을 20년에 걸쳐 복원하겠다고 했다. 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자원봉사자가 경주를 찾아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무작정 찾아와서 일할 곳 내달라 하고, 인증사진 찍고, 밥 내놓으라는 자원봉사는 곤란하다. 뜻이 있다면 성금을 내는 게 제일 좋다. 그러나 경주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경주로 놀러가는 것이다. 일본에서 온천으로 유명한 오이타 현 벳푸의 나가노 야스히로 시장은 지진 때문에 손님이 줄어들자 이렇게 말했다. “벳푸는 손님이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마을입니다.” 천년고도 경주도 그렇다.
여진은 두렵다. 땅 밑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경주 시민들은 그런 곳에서 매일 눈을 뜨고 생활하고 잠을 청한다. 두려움 자체를 없애라고는 못 하겠지만, 두려움에 무릎 꿇는 게 지진을 극복하는 옳은 방법은 아니다. 한 경주 시민이 내 취재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줬다. 분황사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류지명 씨(47)다. “지금 경주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안 오는 것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