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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40>거친 길 위의 사람들

입력 | 2016-10-11 03:00:00


박수근, ‘귀로’. 그림 제공 박수근미술관

 박수근(1914∼1965)은 ‘우리 옆의 소재를 우리 식’으로 그리고자 한 화가였습니다. 외국인 미술 애호가들은 이런 화가의 예술 의지를 지지하고 격려했지요.

 6·25전쟁 이후 다양한 이유로 이 땅을 찾은 외국인들은 거리의 행상과 골목의 아이들이 주인공인 미술에 감응했습니다. 국내 체류 시에는 화가 작업실 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림 판매를 도왔고, 본국에 돌아간 후에도 전시와 글로 화가의 존재를 해외에 알렸습니다.

 외국인 후원자들은 특히 화가 그림 전반에 독자적 인상을 부여하는 질감에 주목했습니다. 실리아 지머먼은 195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단체전 도록에 화가를 ‘새로운 질감의 창조자’로 소개했어요. 마거릿 밀러도 1965년 미국 잡지에 기고한 글에 화가 그림의 두꺼운 질감을 비중 있게 다루었지요. 더 나아가 두 사람 모두 화가의 예술적 성취를 한국 전통의 돌조각과 장식 문양, 창호지와 화강암 겉면의 특성과 연결시켜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허브 누트바도 질감이 거친 화가 그림에 매료된 외국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50여 년 전 화강암 사업차 한국에 온 그는 반도호텔에 묵었습니다. 이곳에서 ‘귀로’와 예기치 못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우연히 들른 호텔 내 화랑에서 투숙객은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 흙빛 세상 속 여인들이 함지박을 이고, 아이를 업고, 짐을 들고 어딘가로 향하는 그림이었지요. 돌에 관심 많던 사업가는 단단한 재질감이 돋보이는 그림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어요. 미국인 소장자와 먼 길을 떠난 그림은 2015년 세상에 다시 존재를 알렸습니다. 고령의 소장자가 지금껏 걸어온 인생길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술관에 그림을 기증했거든요. 그림의 새 보금자리는 소장자 아내가 30년 동안 자원봉사 활동으로 인연을 쌓아온 작은 미술관이라지요.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는 화가의 마지막 거처, 서울 전농동 작업실에 걸려 있던 그림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에 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림 속 고단한 여인들의 삶은 여전히 길 위에 머물러 있더군요.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 우두커니 검정 고무신 여인들과 같은 방향으로 너무 오래 서 있어서였을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를 포함한 행인들이 수많은 우연과 겹겹의 인연을 따라 쉼 없이 이동 중인 그림 속 여인들처럼 여겨졌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