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음식 중 하나인 ‘열구자탕’
황광해 음식평론가
안순환(1871∼1942)에 대한 기록들은 오류투성이다. 오류를 문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순환을 ‘조선음식 전문가’라고 표기하고 그를 통하여 조선음식, 한식이 계승되었다는 말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순환은 음식전문가가 아니었다. “고종의 대령숙수 출신으로 궁내부가 해체되면서 실직한 후 조선 최초의 요릿집 ‘명월관’을 세우고 조선 궁중요리를 계승, 전파했다”는 말도 있다. 완벽한 엉터리다. ‘안순환의 궁중요리’는 한식의 잘못 채운 첫 단추다. 한식은 이때부터 어그러진다. 화려하고 천박한 술집의 안주상을 한식의 밥상으로 여기는 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궁중에서는 호화로운 것을 먹었으리라는 지레짐작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안순환이 ‘명월루’(훗날 명월관)를 세운 것은 1903년. 전선사의 장선이 된 것은 1909년 1월(양력)이다. 전선사는 궁중음식, 연회 등을 맡아 보던 기구로 예전의 사옹원이다. 장선은 6품, 실무책임자다. 안순환은 오랫동안 술집을 운영하다가 궁중음식 관리자가 된 것이다.
안순환은 고종 38년(1901년) 10월(음력) 전환국 기수에서 물러난다. 1903년의 ‘명월루’ 설립으로 바빴을 것이다. 그는 일제와 친일파의 ‘낙하산’이다. 마음대로 오가고 승진한다. 그가 다시 등장하는 것도 엉뚱하다. 4년 후인 고종 42년(1905년) 12월(음력) 기록. ‘9품 안순환을 6품으로 올려주라(陞六·승륙)’는 것이다. 특진이다.
안순환은 ‘궁중’이라는 이름을 팔아먹었을 뿐이다. 명월관을 설립하면서 조선 궁중요리를 판다고 선전했다. 일제강점기 ‘식도원’ 등을 운영하면서 늘 조선 궁중요리와 기생을 들먹였다. 일본인들과 친일파, 졸부, 한량들은 “왕의 기생을 끼고 조선 궁중요리를 먹는다”며 조선과 조선왕조를 능멸했다. 조선에는 궁중에만 있는, 궁중 고유의 음식은 없었다. 궁중잡채는 코미디다. 당면은 한일병합 후 한반도에 등장한다. 신선로도 마찬가지. 우리의 열구자탕과 중국의 탕제자, 일본의 승기악탕(스키야키)이 뒤범벅된 것을 궁중신선로라고 강변하면 곤란하다. 열구자탕은 19세기 동래, 김해 일대 아전들도 먹었다(낙하생집). ‘궁중요리’는 장사치의 호객용 광고 문안일 뿐이다.
‘이왕 전하(순종)가 서거하시면서 유일관 국일관 등 시내 조선요릿집들이 모두 문을 닫고 애도를 표시하는데 유독 식도원만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어 시민들이 분개한다. 주인 안순환은 고종 승하 시에도 장사를 계속했다‘(동아일보 1926년 4월 27일).
안순환은 순종 3년 1월(음력) ‘일본 황태자 전하에게 문안하러 가는’ 내부대신 송병준의 수행원이 된다(승정원일기). 송병준은 이완용급 친일매국노다. 안순환은 국치일 10일 전에 정3품으로 승진했다. 안순환이 조선 궁중과 한식을 계승했을까.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