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키케로는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선한 사람’이라 함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행동에서 “성실과 정직, 공정성과 아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탐욕과 방종,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굳건하게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미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 것이고 그 우정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 주니, 미덕 없이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정은 친구들에게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을 가져다주지만, 그렇다고 우의가 구체적인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족감을 갖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미덕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끌리는 법입니다. 키케로의 ‘우정론’에 등장하는 라일리우스와 그의 평생지기 스키피오의 우정도 서로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서로의 미덕과 인격을 찬탄한 까닭에 서로 좋아했고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될수록 우의도 깊어갔던 겁니다. 만약 이익이 우정의 접착제라면 이익이 사라지면 우정도 해체될 것 아니겠습니까. 키케로는 또한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하는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을지언정, 친구를 위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키케로는 “불한당들 사이의 협력이 우정이란 미명으로 비호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우정이 온갖 방종과 범죄를 향해 문을 열어 두고 있다고 믿는 자들은 위험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친구를 맺을 능력을 준 것은 악덕의 동반자가 아니라 미덕의 조력자가 되라는 뜻이다. 미덕은 혼자서는 최고의 목표에 이를 수 없고, 다른 동반자의 미덕과 결합할 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