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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아시아 8개국서 오피스 임대사업 ‘CEO스위트’ 김은미 대표

입력 | 2016-10-15 03:00:00

자카르타 폭동, 경쟁사들 ‘방’ 뺄때… 의리로 버텼다




김은미 CEO스위트 대표가 지난달 23일 자사의 19번째 지사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파르나스 지점에서 해외 창업 경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호주 기업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창업해 글로벌 서비스드 오피스 기업을 일궈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 “이쪽으로 오세요.”

 흰 칼라가 맵시 있게 달린 검정 블라우스에 스커트, 날렵한 하이힐까지. 그녀가 또박또박 걸어가는 뒷모습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고 당당해 보였다. 유명 유화 작품들이 걸린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이 열리자 강남 한복판 초고층빌딩 29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펼쳐졌다.

#2. 일주일에 80호주달러(현재 환율로 약 6만8000원)짜리 방에서는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벽은 누렇고 침대와 옷장엔 곰팡이가 피었다. 호주로 유학 간 그녀는 그 방마저 월세 70달러를 받고 친구에게 내주고는 거실에서 웅크려 잠을 잤다.



 두 사례 속 ‘그녀’는 동일 인물이다. 아시아 8개국에 19곳의 지점을 가진 서비스드 오피스(Serviced Office)인 ‘CEO스위트’의 김은미 대표(54·여)의 현재와 과거의 한 장면들이다.

 누구나 한번쯤 외국으로 훌쩍 떠나는 꿈을 꾼다. 사표 한 장 가슴에 품고 다니며 나만의 사업을 남몰래 그려보기도 한다. ‘기회의 땅’은 최근 대륙 중국에서 역동의 땅 동남아시아로 넓어지는 추세다. 하지만 낯설고 덥고 습한 이들 국가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공을 일군 스토리는 아직 드물다. 그 스토리의 주인공인 김 대표를 지난달 23일 CEO스위트 19호점이 있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그랜드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만났다.



곰팡이 핀 방에서 키워낸 꿈

 김 대표의 집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다. 회사는 자카르타와 싱가포르, 태국 방콕과 중국 상하이, 필리핀 마닐라 등 아시아 대륙 곳곳에 있다. 지사를 오가다 아침 점심 저녁을 각각 다른 나라에서 먹기 일쑤다. “사수자리가 원래 한곳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잖아요.” 기자와 별자리가 같다는 걸 알고 김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첫 외국행도 그래서였다. 김 대표는 20대 시절 선망 받던 씨티은행 일자리를 버리고 무작정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시절 가세가 기울자 어렵게 취직한 곳이 은행이었는데, 그걸 버린 것이었다. 자칭 ‘숫자치’인 그는 “은행 창구에 앉아 있으면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모의 반대도 심했지만 외국행을 감행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한 김 대표는 호주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이 낡은 집을 구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 하나를 재임대했다. 김 대표는 “그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방을 조금 꾸며서 태국 친구에게 세를 줬는데, 그게 어쩌면 지금 사업의 첫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시드니에서 경영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김 대표를 ‘받아 준’ 곳이 현재의 CEO스위트와 같은 업종인 서비스드 오피스 기업이었다. 서비스드 오피스는 사무실과 비서 업무를 빌려주는 사업이다.

 김 대표는 호주에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첫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았다. 적자만 내고 있어 폐점을 논의 중이던 태국 방콕 지사로 입사 6개월 차에 자원해서 떠났다. 태국 지사에 당도해 보니 직원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지각을 일삼고 맨발로 회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 대표는 현지 직원들을 영어 학원부터 보냈고 외국계 고객사와 파티를 열어줬다. “나는 떠날 사람이다. 여러분 중에 방콕 지사장이 나와야 한다”며 독려했다. “몇 개월 뒤 아침 회의 때 처음으로 전 직원이 스타킹에 구두를 제대로 갖춰 신고 나온 것을 봤을 때가 가장 짜릿했다”고 김 대표는 회상했다. 진심이 통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직원들과 마음이 통하고 나니 변화는 저절로 찾아왔다. 방콕 지사의 매출은 1년 만에 3배로 증가했다. 20대를 바쳐 이뤄낸 첫 성공이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 법

 방콕 지사 2곳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사를 비롯해 아시아 10개 지사를 성공 궤도에 올리면서 7년이 흘렀다. 자카르타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경력과 연봉은 쌓여 갔지만 호주 회사에서 아시아계라는 약점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일본 지사로 가고 싶은 열망에 도쿄 지사 오픈을 진두지휘했지만 결국 지사장 자리는 젊은 백인 여성에게 돌아갔다. 김 대표는 사표를 냈다. 몇 개월을 쉬다가 그간의 노하우를 살려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1997년 9월 1일 자카르타에서 어렵게 회사 문을 열었다. 그런데 몇 개월 만에 아시아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자카르타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도심에서는 폭탄이 터지는 등 전시를 방불케 하는 혼란이 있었다. 게다가 김 대표는 임신까지 한 상태였다. 해외 사업을 시작하며 상상할 수 있는 악재는 모두 겹친 셈이다.

 밤잠을 못 이루던 김 대표가 되새긴 것은 오직 ‘성공에 대한 믿음’과 ‘남들과 다르게 하라’는 원칙이었다. 경쟁사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자카르타를 떠날 때 그는 신의를 다하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서구에 주로 본사를 두고 있던 고객사들에는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100만 달러를 물어 주겠다’고 공증까지 했다. 그러고 과감하게 회사의 설비와 서비스를 더 늘렸다.

 폭동이 잠잠해지고 도시가 안정을 찾자 오피스서비스 기업은 김 대표 회사 한 곳만 남아있었다. ‘외환위기도 비켜 간 회사’ ‘모두가 떠날 때도 남아서 제 할 일을 한 회사’라는 소문이 나면서 고객사가 몰려들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주로 외국 기업이 이용하는 김 대표의 회사가 버텨준 덕분에 외국 기업의 탈출 러시를 줄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해외 창업에 성공한 그에게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라고 물었다. 김 대표는 “95%가 망한다는 걸 먼저 알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남의 나라에서는 언제까지고 ‘마이너리티(소수자)’다. 사업가가 내 인생의 꿈이고,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라는 확신 없이는 사업에 나서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김 대표가 말하는 성공 제1원칙은 무엇보다 자신감이다. 김 대표는 “어떤 상황에서도 투자가나 시장, 운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며 “‘나는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하고, 그 이기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할 때는 의사전달 능력이 특히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영어의 발음보다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간단하게 요점을 전달하는 능력, 나는 그걸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메시지 축약의 중요성은 직원들에게도 전달했다. 김 대표는 직원들에게 “주어+동사+목적어 형식을 넘지 마라. 의사 전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직원들은 입주한 글로벌 기업들과도 자주 의사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소통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싱가포르와 필리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지사장과 30분간 화상회의를 한다. 여러 국가에 흩어져 있는 직원들이 9가지 악센트의 다양한 영어로 바쁘게 대화를 나누지만 별다른 혼선 없이 소통이 가능한 것은 메시지 축약 훈련 덕분이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훑어 읽고 요점을 파악하는 ‘스키밍(skimming)’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 소재가 되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존을 위해 뿌리는 씨앗

 김 대표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한 아들의 어머니다. 아들이 커갈수록 자카르타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구걸하는 아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는 이들에게도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김 대표는 “그렇게 땅이 넓고 농부가 많은 곳인데도 여전히 쌀을 수입하고 농가는 가난하다”고 자카르타를 표현했다.

 그래서 10년 전부터 해온 프로젝트가 ‘러닝팜(배움의 농장)’이다. 가난한 농가 청소년들에게 기숙사를 지어줘 유기농법과 특화작물 재배법을 교육하고 견실한 농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지 대사 부인들의 도움과 유니세프 등 글로벌 비정부기구(NGO)의 자금을 모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 3개월마다 졸업생 100명을 배출하는 제법 규모를 갖춘 프로그램이 됐다. “이젠 인도네시아의 모든 대사관에서 홈 파티가 열릴 때마다 러닝팜 펀딩이 같이 이뤄진다”며 김 대표는 웃었다.

 김 대표는 “사람들은 저를 두고 ‘일과 가정을 모두 잡았다’고 얘기하지만 제 삶의 대부분은 일에 쏠려 있었고, 그로 인해 잃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 때문에 아들이나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듯했다.

 김 대표의 관심은 이제 아들을 넘어 한국의 젊은이들로도 향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자신이 하는 사업과 연계해 젊은이들에게 해외 진출에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멘토 역할도 자청하고 있다. 자신의 해외 진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가급적 달려가 강연으로 지식을 나눈다.

 CEO스위트를 운영하면서도 입주한 젊은 스타트업 창업가에게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아낌없이 연결해 주고 있다. 김 대표는 “문화와 관습이 다른 해외에서 창업을 하려면 얼마나 막막한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며 “동남아시아 8개국에서 일하며 쌓은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가 젊은이들에게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곽도영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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